하나님은 상처도 영광이 되게 하신다.(창 35:16-21)



복음은 “그러나”라는 단어로부터 출발한다. 과거에 우리는 저주와 심판 아래에 있었다. 과거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었다. 과거에 우리는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 아래에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생명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 지금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찬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이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의 핵심이 “그러나”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로 비틀려진 삶을 완전히 역전시키시는 분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사망의 길에 들어선 인간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생명의 길에 서게 하셨다. 메마른 광야를 출애굽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은혜와 기적의 터전으로 삼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다.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사망의 고통을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다윗은 시 30:11절에서,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고 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상처도 영광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나누려고 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를 다스려 나가시는가?


1. 하나님은 슬픔을 기회의 문으로 바꾸신다.


본문은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성경은 그녀가 두 번째로 아들을 낳을 때, 매우 고생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16절,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여기서 ‘심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왓테카쉬’인데,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 혹독한’이라는 뜻이다. 라헬은 ‘혹독한 고통, 잔인할 정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그랬는지, 그녀는 아들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곧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다. 자식을 낳으면서 세상을 떠나는 슬픔,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하는 자식의 삶에 대한 슬픔 같은 것이 배경에 깔려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노니’라는 이름을 바꾸신다. 야곱을 통해서 ‘베냐민’, 곧 ‘오른손의 아들’로 바꾸게 하신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슬픔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의 아들”을 “오른손의 아들”로 삼으셨다. 라헬은 자기의 둘째 아들을 보면서 슬퍼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것이다. 신 33:12절에서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베냐민에 대해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슬픔이나 연약함, 부족함이나 실패와 같은 것을 바꾸셔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사 61: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서 기쁨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하신다.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다.


2. 하나님은 고통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로 바꾸신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면, 그것도 반전의 역사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예언을 했는데, 예수님이 탄생하실 장소가 어디냐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이다. ‘에브라다’, 성경에는 ‘에브랏’이라고 더 많이 소개되어 있는 이 땅은 이스라엘의 한과 슬픔이 응집된 지역이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라헬은 에브랏으로 향하는 길에 산통을 느꼈다. 라헬은 바로 거기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야곱은 라헬의 죽음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웠던 마음을 에브랏 길가에 묻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생명을 묻고, 마음의 슬픔을 묻고, 일생의 사랑을 묻었다.


룻기를 보면, 엘리멜렉, 말론, 기룐의 이름이 짧게 등장한다. 그들은 베들레헴 고향을 떠난 타지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고향 땅에 들었던 기근 때문에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룻기에 이름만 짧게 등장했던 세 사람의 이야기는 완전히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에 나오는 여인 나오미가 다시 하나님을 찾아 돌아오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한과 슬픔의 땅,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땅에서 새로운 소망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오미는 작의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룻은 보아스와 만나서 오벳을 낳았다. 이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그리고 룻기의 마지막은 다윗 왕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매듭짓고 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한과 슬픔이 있던 땅이었다. 그런데 그 땅에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과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가 태어나서 자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왕 다윗도 그 곳에서 태어나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땅, 죽음과 슬픔이 묻혀있고, 모든 것을 상실하게 만든 땅이다. 그러나 룻기를 통해서 반전이 일어난 땅이 베들레헴이다. 가장 깊은 고난의 현장에서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땅으로 바뀌었고, 순종과 신뢰가 회복되는 땅으로 변화되었다. 사무엘 시대에 와서는 왕가의 땅이 되었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 이런 것이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으셔야 한다. 인생의 가장 쓴 뿌리, 사망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바꾸셔서 위대한 왕가로 세우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으셔야 한다.


3. 모든 것의 결국이 은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라헬의 삶을 신중하게 보아야 한다. 라헬은 성경에서 신실했다든지, 마음이 착하다든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다든지 하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어머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라헬이라는 인물 자체를 보면, 그렇게 불려질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라헬은 축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나?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그녀가 야곱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12지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관계에서 나왔던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나오는 것도 은혜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다. 두 자매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면서 출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레아와 라헬이 나은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라헬의 경우에는 어떤 자격이 있어서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과 선택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약속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성실함 안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시녀들로부터 태어난 아들들이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그렇게 성장해 나간 것이다.


오늘날 성도의 삶도 그들과 똑같다. 다르지 않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 때문이다. 성도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서, ‘먼지투성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하피루’이다. 그런데 그런 ‘먼지투성이, 하피루들’을 일으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보잘 것 없는 히브리 민족을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 삼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담겼을 때, 그들은 강한 민족으로 성장해 갔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지면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삶이나 사역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산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매일 매순간 은혜를 적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무슨 일이 생기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고 힘을 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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