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4장 말씀은 야베스의 기도로 불려지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역대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고 난 다음에 쓰여진 책입니다. 여기에는 지루할 정도로 족보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역대상 4장 말씀도 유다 자손의 족보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야베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역대기서가 이 족보에 집착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야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주전 538년에 칙령을 받아가지고 너네 땅으로 돌아가라 그러고 나서 이제 주전 537년에 예루살렘으로 일부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돌아오게 될 때, 사람들 안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70여 년 전에 살던 땅이 여전히 우리 땅일까?’ 이런 고민이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차지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우리가 땅을 뺏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간다고 그게 우리 땅이 될까?, 우리가 과연 그곳에 가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고민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때에 그 사람들에게 던져준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가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역대기서의 메시지는 이렇게 일관되게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도록 이끌어 주시고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역대상 4장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이 한 구절에는 굉장히 짧지만 굉장히 다양한 메타포가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야베스에게 다른 형제들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이 슬픔 고통 이런 뜻이라고 했잖아요. 그 출생 과정을 보니까 어머니가 수고로이 나왔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히브리말로는 ‘오체브’라고 하는 단어가 나갔는데요. 창세기 3장 16절 보면, 사람이 자녀를 잉태하는데 그 잉태의 고통을 하나님이 주시겠다. 그래서 자녀를 수고롭게 낳는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때 임신하는 고통과 관련된 이 단어 이 단어가 히브리말로 아차브예요. 이 말이 고통, 수고하다 라는 뜻인데, 이 야베스를 수고롭게 낳았다고 할 때 그 오체보라고 하는 말하고 어근이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역대상 4장 9절 말씀을 보면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어머니가 지독한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야베스를 낳았다라고 하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라고 하는 말이나 오체브라고 하는 말이나 혹은 아차브라고 하는 말이나 이게 다 어근이 같습니다. 야베스가 이 고통 중에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굉장한 고통과 난산입니다. 고통 중에 아이를 출산했는데 사실 우리가 인간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를 근원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바로 죄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고통이 들어왔느냐? 죄입니다. 그러면 임신하는 고통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그게 죄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이야기하는 바가 그거 아닙니까? 왜 여자가 임신하는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게 되느냐? 바로 범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의 고난이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이 죄로 인한 시작이라는 죄로 인한 거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고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수십 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고난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이 아차브라고 하는 말이 고통이다 수고한다 이런 뜻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차브는 굉장히 묘한 단어입니다. 이 아차브라고 하는 말이 창세기 3장 16절에 나오는 단어인데 이 말이 모양을 만든다 이런 뜻을 또 가지고 있습니다. 1차적인 뜻으로는 고통, 수고한다 라는 뜻이 있는데, 2차적인 뜻으로는 모양을 만든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욥기 10장 8절을 보면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지셨는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이제 고백하는 하나님 내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런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 주님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때 빚으셨다. 모양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아차보 입니다. 아차브는 굉장히 묘합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어떤 모양을 만들면 그 모양은 거룩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 거룩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가지고 어떤 형상을 만듭니다. 그럼 그게 뭐가 되죠? 우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죄와 고통과 우상이 다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가 됐단 말입니다. 그 고통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냐? 범죄인데 그 범죄의 구체성은 뭐냐?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의 죄, 우상숭배로 인해서 심판과 고난 속에서 태어난 그런 존재를 상징하는 일종의 메타포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 중에 그런 상처 중에, 그런 아픔 중에 태어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귀한 자가 되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진흙탕 속에서 태어났는데 그 진흙탕 속에서 태어난 자가 보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말구유 속에서 태어났는데, 그런데 말구유에 누여진 그 예수님이 인생을 구원하는 그 경외로운 존재가 되셨던 것처럼, 야베스도 어두운 가운데 그 진흙과 같은 곳에서 고통 가운데, 괴로움 가운데, 상처 가운데, 슬픔 가운데, 태어났는데 귀중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창립 48주년 기념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서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존재로 살 때,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존귀한 자로 사용하시느냐, 그것을 알려면 오늘 말씀을 우리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하나님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로 들어와서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와서 연합이 되니까 그는 그가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돼서 일하시니까, 하나님이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부르짖는 자가 되어 기도하는 자가 돼서 하나님 말씀의 영역을 내가 딱 지키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들어와서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에게로 들어가셨습니다. 엘로힘 하나님이 그에게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이나 제 안에는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한 자인 것을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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