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구원의 원리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고 죽은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즉, 옛날에 예수님에 대해서 들 어보지도 못한 조상들이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자연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 하면, “양심”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따 른 사람들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요. 양심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얼 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양심에 어긋나게 삽니다. 그래서 심판받는 인생이 됩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세상에서 무너지기 쉽습니다. 양심을 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선한 의지와 열심으로는 구원에 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 “예수님 이름에 올라타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스스로 하늘을 날기는 쉽지 않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 올라타면, 아주 쉽게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그냥 올라탔을 뿐인데,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영접하고, 그 이름에 올라타기만 하면, 천국 영생의 삶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의도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알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보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롬 1:19절에서도 그것을 말했습니다. 롬 1:19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3절에서는,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정욕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구약 시대에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그랬습니다. 애굽도 그랬습니다. 가나안 7족속들도 그랬습니다. 심 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한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24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했다는 것이 고, 둘째는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정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피튀미아이스’라는 말입니다. 약 1:13-14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시험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시험’을 집어 넣냐면, 사람의 욕심에다가 시험을 집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욕심”이라는 말이 ‘에피튀미아이스’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을 향하여’라는 뜻의 ‘에피’라는 말과 ‘열망, 갈망’이라는 뜻의 ‘튀모스’가 합쳐진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욕, 욕심”이라는 말은 ‘자기 안에 있는 열망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열망, 자기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려 는 뜨거운 마음이 “정욕”이고, “욕심”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롬 1장에서는, 그런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범죄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을 알지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여러분, 사람을 포기할 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포기할 때 뭐라고 합니까? 사람에 대해 포기할 때, “니 마음대로 해라”고 합 니다. 무슨 뜻입니까? 더이상 관심도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지옥 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버림받은 사람들이 고통과 후회 속에서 머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남들이 가니까 자기도 잘못된 길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그게 전염이 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그게 전염이 됩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게 전염이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자기 자아의 만족을 이루려고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는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의 정욕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끄는 삶을 살 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의 주제입니다. 자기 만족과 정욕으로 인한 인생은 공허와 허무로 끝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 시간은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되고, 신앙의 역사가 되고, 교회의 역사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들 중에 나이를 언급하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나이가 75세 였다”고 소개합니다. 모든 사람의 나이를 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를 말한 것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였다 는 것을 소개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에게 의미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느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고 싶으셨던 “의미있는 시간”이 얼 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수”로 헤아려 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를 헤아려 보면, 75세 부터 시작해서 175세에 죽습니다. 그러면 100년입니다. 이 생애가 하나님께 만족이 되는 생애였습니다.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 만족할 만한 인생으로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죽을 때,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 25:8)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높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사베아’라고 했습니다. ‘사베아’는 180세를 살았던 이삭에게도 쓰였고, 70세를 살았던 다윗에게도 쓰였다고 했습니다. 욥기에서 욥은 140세를 살았는데, 그에게도 ‘사베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130세를 살았는데, 그 에게도 ‘사베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수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오래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의 의미가 ‘나이에 꽉 차게 살았다, 나이에 만족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한 노인이 80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80세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기의 인생을 시간으로 환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잠을 잔 시간이 26년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잠만 26 년을 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한 시간을 따져 봤더니 21년이었습니다. 식사 하는 시간이 6 년이었고, 남이 시간을 안 지켜서 기다리느라고 빼앗긴 시간이 5년이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해 하던 시간이 5년, 수염을 깎았던 시간이 228일, 아이들과 놀아주던 시간이 26일, 넥타이를 멘 시간만 18일, 담배를 핀 시간이 12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시간으로 환산해 보니까 고작 46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산해 놓고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 에서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가는 시간 동안, 하나님이 주목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에게 의 미있는 시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께 의미있는 시간으로 사는 길이겠습니까? 롬 1:25절을 보십시요.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하나님보다 피조세계를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 성도는 이와 반대로 살면 됩니다.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경배하고 섬기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앞세우고, 말씀을 앞세우고, 기도를 앞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깨어 서 사는 인생이 될 때, 의미가 되고, 역사가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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