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중에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그 씨름의 결과, 야곱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창 32:28절에서,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 이 아닙니다. ‘사람과 싸워서 이겼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이란 말은 ‘사라’라는 말과 ‘엘’의 합성어라고 했습니다. ‘엘’이 ‘하나님’이란 뜻이지 않습니까? ‘사라’는 ‘왕으 로서 권력을 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 하나님의 통치만 붙잡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창 32:28절을 잘 생각해 보십시요.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사람들과 겨루어서 이겼다고 했는데, 창 32장까지 야곱이 겨루었던 사람이 둘입니다. 그게 누구 입니까? 에서와 라반입니다. 야곱이 이 두 사람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에서와 무엇을 두고 겨루었습니까? “장자권”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자권”이라는 언약을 가볍게 여겨서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언약”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약속을 붙잡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약속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에서와 겨루어서 이겼습니다. 라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여러 번 속였습니다. 그를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그러나 야 곱은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창 31:6절 이하를 보면, 야곱이 레아와 라헬에게 하는 말 이 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자기를 속여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창 31:9)고 했습니다. 라반과 헤어질 때도, 야곱은 그와 같은 말을 합니다. 창 31:41절 이하에서, “내가 외삼촌의 집에서 이십 년 동 안 봉사했지만, 외삼촌이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으면 외 삼촌이 나를 빈 손으로 돌려보냈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창 31:42)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에서나 라반과 겨루어서 이겼다고 했는데, 누구를 붙잡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 32:26 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 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와 씨름을 하던 중에 엉덩이 뼈가 부러졌습니다. 얼마나 아 프고 괴로웠겠습니까? 인생이 시원하게 풀려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 중에도 “당신이 내 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습니다. 보내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야곱이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은 자”라는 의미를 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자”라는 뜻으로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 하고, 항상 하나님만 붙잡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해서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야곱은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오면, 벧엘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겠 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서원입니다.(창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 이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지 않습니다.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서 10년을 지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에서와 화해를 이룬 다음에 숙곳에서 3년을 지내고, 세겜에서 7년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오래 머문 이유는 땅이 비옥해서 농사짓기에 좋고, 먹고 살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야 곱은 세겜 성읍의 땅을 백 크시타에 샀습니다. 그런데 땅을 산 이유가 무엇이냐면, 자기 장막을 치기 위 해서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산 땅에서, 자기 힘으로 장막을 친 것입니다.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의지해서 산 땅에서 살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갚지 않고, 자기가 지내기 좋고 편한 곳에서 살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세겜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면,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겁탑한 뒤에,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하 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풍요로움에 참여하라”는 말입니다. 통혼을 해서 하나가 되자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누리는 비옥함과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겜”이라는 땅 의 정체입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의 노력과 능력으로 선택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노력과 능력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닙니다. 오로지 “비옥한 토지, 풍요로움과 부요함”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속적인 풍요로움과 부요함을 지향하다가 어떻게 된다는 것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디나가 겁탈을 당하고, 그 일로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족속에게 복수를 한다고 그들을 몰살시킵니다. 이게 가나안 족속들에게 보복당할 만한 큰 위기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상을 집에 들였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 35:2절에서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 35:2절을 보면,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게 충격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말씀을 뒤집어서 보면, 야곱의 집안에 이방 신상들이 들어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만 딱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인데, 그 이름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신자로서의 기도가 없습니다. 가나안에 돌아와서 10여년 동안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말씀과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위기였습니다. 성도의 삶에 위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를 놓으면 위기입니다. 인생이 평안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게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잘 되고 있는 인생이라면,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귀는 사람들에게 작은 성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작은 성공에 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학생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학원에 가서 조금 나은 성적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게 작은 성 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세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직위를 얻 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작은 성공입니다. 그런데 그 결 과는 무엇입니까? 인생의 행복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출세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앞세워서 세상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릭 리들”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에릭 리들, 불의 전차”라는 영화로 너무 유명해진 이야기 아닙니까? 1902년에 태어난 “에릭 리들”이 1924 년 파리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100미터 단거리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거의 모 든 대회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0미터 예선 경기가 주일 오후 3시에 열리게 되었습니 다. 주일 오전도 아니고 오후였습니다. 그때 “에릭 리들”이 성명을 냅니다. “저는 주일에는 뛸 수가 없 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를 사랑하던 영국의 팬들이 “에릭 리들”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국을 버린 자”라고 욕하고, “옹졸하고 편협한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웨일즈 왕세자가 경기에 참가하 라고 편지까지 썼습니다. 그래도 결국 주일에 있는 예선 경기에 불참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400미터 경기가 평일에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독에게 부탁해서 400미터 경기에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0미터 단거리 선수가 400미터 경기를 뛰어서 성적을 내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당시 400미터에 참가했던 선수들 중에는 세계기록 보유자를 비롟한 선수권자들이 여 럿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400미터 참가를 말렸습니다. 괜히 망신만 당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 입니다. 그런데 “에릭 리들”은 경기에 참가합니다. 경기에 뛰기 전에 트레이너가 쪽지를 주는데, 그 쪽지에 적힌 말씀을 마음에 품고 달립니다. 그 말씀 이 삼상 2:30절입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 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내가 뛰는 것은 혼자가 아니다, 내 안에 주 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으로 뜁니다. 400미터를 뛰는데, 처음부터 100미터를 뛰는 것처럼 뜁니다. 사람들이 뒤에 가서 지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그렇게 뜁니다. 그래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설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경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의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창 35: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른 관계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리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축복의 출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리가 은혜의 시작이고, 축복의 시작이고, 형통함의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건을 자기 인생의 사건이 되게 했습니다. 말씀을 깨달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사건이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약속으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건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그냥 흘러가게 버려두면 시간 속에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인생을 걸면, 사건 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건이 됩니다. 말씀이 사건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하 는 성도가 되고, 부흥의 불이 되는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 영상:
תגובו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