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에 있다.(마 5:1-10)


로이드 존스는 “우리 모두가 산상설교대로 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복음에 다이내믹한 것이 있음을 알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임을 알 것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메시지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준다.

산상수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존재해야 하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대할 때, 성도는 자기의 힘으로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신자로 하여금 더욱 성령님을 의지하게 한다. 그러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계속해서 강조했던 것처럼, 여러분은 산상설교를 대할 때마다 성령님을 구해야 한다.

1.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개념이 무엇인가?

성경 원문을 보면, 팔복의 메시지는 항상 “복이 있나니”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이’인데, 원형이 ‘마카리오스’이다. 이 단어는 어떤 환경에 기초한 행복이 아니다. 환경이 긍정적이고 좋기 때문에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복감이다.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야 행복해지는 것은 헬라어로 ‘유다이모니아’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분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쾌락)가 아니라 “유다이모니즘”, 즉 ‘행복론’을 자기 철학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행복론은 “좋은 것”이 채워져야 하는 행복이다. 거기에는 쾌락도 있고, 우정과 사랑도 있고, 명예와 돈도 있어야 한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탁월한 모든 것이 있어야 행복이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 못생기거나 외롭거나 자식이 없어도 ‘유다이몬’(즉,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헬라어로 ‘유다이모니아’는 현세적인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되는 행복감이다. 반면에 ‘마카리오스’는 없어지지 않는다. 롬 4:7절을 보면,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했다. 자기의 불법이 용서를 받은 사람, 자기의 죄가 가려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나? 롬 4:8절에서는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사망의 죄에서 살아난 사람의 행복감이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 그런 것이다. 조건에 따라서 주어지는 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마카리오스’는 소멸되지 않는 복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충만하고 완전한 복이다.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삶의 환경이나 조건들에 따라서 바뀌는 감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그런 기쁨과 충만함이다.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기쁨이 바로 ‘마카리오스’이다. 유명한 주석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인간의 행복은 삶의 기회와 변화에 좌우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삶이 행복을 줄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복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고 공격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도가 그런 충만함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질 수 없다. 내가 머리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질 때 가능하다. 로이드 존스는 “팔복의 말씀은 나를 바닥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팔복은 내게 내 자신이 철저히 무력함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하게 의지해야 한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전에는 이것이 이루어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도의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2. 팔복에 담겨진 역석절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첫 번째가 무엇인가?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복이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가난한 것이 복인가, 부요한 것이 복인가? 예수님은 마음이 부유해져야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하셨다.

현대인들은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이 채워져서 마음이 넉넉해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말한다. 마음이 가난해져야 복이 있다는 것이다. 자아가 깨지고 부서져서 낮아지고 낮아질 때 천국이 소유된다는 말씀이다. 칼빈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오는 말씀들도 똑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4절)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애통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시나? 아니면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시나?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자기의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진 사람이 애통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기억하시나? 기억하셔야 한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했다. 그는 마음이 부유한 자였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했다. 반면에 세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였다. 하나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애통해 했다.

이렇게 자기의 죄된 모습에 어쩔 수가 없어서 애통해 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 누가 애통해 하는 자가 되는가? 내가 머리가 되어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애통해 하지 않는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산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할 때, 애통함을 안다. 주인의 기대에 전혀 부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면 애통하게 된다. 죄된 자기의 본성에 여지없이 가난한 마음이 되고, 겸손한 마음이 되고, 애통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결국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인되시기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기의 본성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머리가 되실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머리가 아니라 내가 머리가 되어서 살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자기의 이성과 자아의 생각이 머리가 되어 있으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면, 자신의 어두움과 직면하게 된다. 자기를 보면서 애통이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구할 수밖에 없다. 그때 위로가 임한다. 그때 은혜가 임하고, 그 은혜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말씀이 보여지고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팔복의 역설적 의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앙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3. 그러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다. 온유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다. 온유함이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말이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말로 길들여진 상태를 말한다고 했다. 자기의 애통함을 보고, 주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온유할 수밖에 없다. 사망의 죄에서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서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순종의 삶이 결국에는 축복의 삶으로 나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는 광야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으로 길들여진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팔복은 모두가 하나씩 연결되어 있다.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이겠나? 이것은 세상의 정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겠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사람,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렇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만, 끊임없이 목마른 상태이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이 모두 이런 맥락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그런 존재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소유를 지향하면 만족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을 가져서 행복하고, 무엇을 가지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가지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져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이루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마 그것을 이룬다고 해도 불행하다.

오늘 설교 제목이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러분,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의 교훈은 명백하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붙잡고 있으면 계속해서 소유를 쫓게 된다.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권세, 더 많은 출세, 더 많은 성공을 쫓게 된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이루면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되시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이 가진 모두 소유와 성공과 출세와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자기의 죄된 본성, 연약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기초이다. 그 믿음으로 복된 성도의 삶을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