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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어간다.(계 1:9-20)



오늘 읽은 대목에서 사도 요한은 초대교회에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받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10절에 의하면, 그는 “주의 날”에 환상을 보았는데, 여기서 “주의 날”이란 오늘날 우리가 예배하는 주일이다. 그는 “주님의 날(Lord’s Day), 즉 오늘날 우리가 예배하는 주일(일요일)”에 주님을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 요한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중에, 다시 말해서 경건생활을 열심히 하는 중에, 성령님에게 감동되어서 하나님의 묵시를 보게 된 것이다. 그가 바라본 묵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다.

1.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보면 담대할 수 있다.

요한이 보았던 첫 번째 환상을 살펴보자. 10절을 보면,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했다. 성령에 감동된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여기서 요한은 아주 의도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나팔 소리”에 비유했다. 그 이유가 있다. 나팔 소리가 성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아는 것이 요한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팔 소리가 울렸던 때가 언제인가? 백성을 불러 모으거나 파수꾼이 경고할 때(겔 33:6), 그리고 전쟁이나 절기를 맞았을 때이다. 한 마디로 백성들의 주의를 요구할 때였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상대를 일깨울 때 불려졌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큰 음성을 나팔 소리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이 요한의 주의를 이끌려는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모든 이들도 특별한 집중력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주의 깊게 대해야 하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 말씀이 “나팔 소리”가 되어서 잠자는 자들의 영혼을 깨우는 소리가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무엇에 대해서 깨어나야 하는가?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영혼의 깨어남이 있어야 한다. 13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형상을 보았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분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 분이신데, 바로 예수님이시다.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을 연상시킨다. 제사장은 하체를 가리기 위해 긴 옷을 입었다. 제사장은 모든 삶의 질고와 걱정거리와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초대교회의 모든 아픔과 질고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가슴의 금띠는 세상을 통치하는 왕을 연상시킨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상징이다.

14절에서는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했다. 하얀색은 순결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동시에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다고 했다. 15절에서는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라고 했다. 빛난 주석은 강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도미티아누스도 발로 밟으실 수 있는 강력한 발을 가지셨다. 물소리는 침묵하지 않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우렁찬 말씀 소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 장황한 설명을 통해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가 보고 함께 지냈던 인간 이상의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자신이 본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의 영광이 너무나 강력해서, 강력한 영광의 광채를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자이신 예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환난을 참아낼 수 있었다. 성도란 그렇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인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 주님의 영광을 보면 신앙의 태도가 달라진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예수님에게 사랑받았던 이 제자가 세상에서 자기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복음전도자요, 신학자요, 장로요, 사도요,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 앞에서는 그저 무력하게 엎드려 떠는 인간이 되었다. 한 마디로 요한은 이 환상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예수님의 영광을 본 순간 사도 요한은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1741년 7월 8일 조나단 에드워즈가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 설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설교로 꼽힌다. “그들이 실족할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신 32:25)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를 한 단어 한 단어 읽어 나갔다. 사실 그는 설교자로서 전달력이 시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은 마치 거미를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당신을 지옥의 구덩이 위에서 붙잡고 계십니다... 오직 그 분의 손 덕분에 당신은 매 순간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는 신세를 면하는 것입니다.”라고 설교하자, 성령의 능력이 청중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차 괴로움에 신음하거나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지옥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에배당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바깥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도 지옥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이 나무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잠시 맛본 것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 것은 오직 그 때 한번 뿐이었다고 한다. 이 놀라운 설교 소실이 며칠 만에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미국의 18세기 대각성운동(1726-1750년) 절정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만나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앞도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성도들이 엎드러지게 된다. 자기의 죄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무게감에 압도당한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에 모든 것이 압도당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생이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면 기도하는 성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전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에 압도당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아가 무너지고, 오로지 주님의 뜻과 섭리에 주목하게 된다. 요한도 그랬다.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순간에 그는 엎드러졌다. 강력한 주님의 영광을 보자 거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러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자기가 위로를 받아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교회의 성도들을 위로하는 사명자가 되었다. 자기의 형편이 곤고한 중에 있는데, 오히려 성도들의 곤고함을 위로하는 자가 되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임하게 하소서)

3. 성도는 기도하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 “영광”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보드’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카보드’의 원형인 ‘카바드’라는 말이 ‘무겁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무겁다”라는 말 하나로 영광이라는 말이 정리된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무거움, 무게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게감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가? 가벼우신가 무거우신가? 그런데 어떤 무게감을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완전히 달라진다. ‘카보드’라는 단어를 헬라어로는 ‘독사’라고 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되는 것이 ‘독사, 즉 영광’이라는 것이다. 카보드와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무게감이 그 자체의 무게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게감을 깨닫고, 그 무게감 앞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다스려 나가신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러져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항상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이다. 요한이 묵시를 보고 엎드러졌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구부리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을 내밀어 요한을 위로해 주셨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17절) 주님이 이런 분이시다. 우리가 자기의 실수나 실패로 인해서 괴로움에 빠져 있을 때, 죄악이나 사고나 질병으로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낙심이나 슬픔에 빠져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교회는 반드시 이기고 승리한다. 렇다면 우리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무엇을 붙들어야 하겠나? 기도의 자리를 붙들어야 한다. 처음 설교를 시작하면서, 요한이 환상을 보았던 때가 “주의 날”이라고 했다. 그는 ‘주의 날’에 기도하고 있었다. 예배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위로와 소망을 보았던 것이다. 성도가 결국 이와 같아야 한다. 기도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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