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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창 30:1-8)


레아와 라헬은 서로 자매지간이다. 그러니까 둘이 서로 격려하고 이해하고 위로하면서 사는 모습으로 그려지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한다. 동생이 언니를 시기하고, 자매가 서로 경쟁하려고 한다. 1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을 때, 언니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처럼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언니였던 레아는 자기 동생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졌다면 어땠겠나? 동생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보면서 위로하고 사랑하는 언니로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나? 사랑과 화목을 이루는 가정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헬은 시기와 경쟁을 시작했고, 레아는 마음을 닫아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인간의 연약한 본성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 가운데서도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 가운데서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레아와 라헬이 서로의 다툼과 경쟁으로 자식을 낳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자녀들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삼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1. 하나님의 은혜가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은혜라는 말이 헬라어로 ‘카리스‘인데, 이것은 전혀 받기에는 부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 것이다. 요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머물게 되셨을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하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은혜가 완전하고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기에 충분하고도 완전하다.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고 보호하시기 충분하고도 완전하다.


성도는 이런 예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붙잡혀서 살아야 한다. 은혜는 우리가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붙들어둔 것은 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아무리 남을 후하게 용서해도 하나님께 받은 용서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것이 은혜이다. 예수님은 자격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야곱의 생애가 그런 것처럼, 여인들의 삶도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죄인처럼 살아갔던 여자들의 자식을 축복하셨다. 그들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삼으셨다. 야곱이나 레아와 라헬로부터 출생한 자식들이나 한결같이 자격이나 조건을 갖춘 것이 아니다. 믿음이 탁월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복을 받았다. 인간은 연약해서 자꾸 죄악의 길로 빠져 들어가려고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실패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을 기억하시는 분이다. 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긍휼이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신다.


우리는 창 30장에서 흐르는 라헬의 감정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라헬은 언니보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런데 레아가 자식들을 낳기 시작하니까 시기심이 들어왔다. 1절을 다시 보자.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사람들은 자식을 낳으면, 사랑을 표현하는 대부분이 자식에게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라헬이 레아를 시기하게 된 것은 레아의 자식들 때문이었다. 야곱이 아들을 낳았을 때, 어린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애정표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서 라헬은 시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 있으면 시기한다. 라헬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언니였는데,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까 창 30장의 전반부에 흐르는 라헬의 감정은 타인을 향한 경쟁심이었다. 여기서 “경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탈르티’는 ‘격투하다, 뒤틀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라헬이 자기 언니에 대해서 얼마나 비틀리고 과격한 감정을 가지어 있었는지를 드러낸 표현이다.


그런데 그녀의 감정이 변한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요셉을 선물로 주셨을 때이다. 그 무렵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셨다고 했다. 창 33:22절에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이 ‘와이쉬마 엘레하’이다. ‘듣다’에 해당하는 ‘샤마’라는 단어가 전치사 ‘엘’과 함께 사용되면, 의미가 특별해진다. 그것은 ‘~인가를 염려해서 듣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이 무렵에 하나님께서 라헬을 염려하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라헬을 불쌍히 여기신 이유가 무엇이겠나? 그녀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다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불쌍히 여기셨을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수년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다. 누구 때문에 자식이 생기지 않는지가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야곱과의 관계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자기만 자식이 없었다. 그러니까 누구 때문인지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누구의 잘못인지가 확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년 동안 라헬의 마음이 낮아지고 낮아졌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시기하는 감정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에게 확실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나?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고백했을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한나처럼 한없이 가난한 심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자아가 낮아지고 낮아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라헬에게 태의 문을 열어 주셨다. 그러니까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창 30:23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사람을 위로하신다.


3. 하나님의 열심이 성도의 삶을 온전하게 하신다.


창 30장을 보면, 남편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서 여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야곱의 가정을 일으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꾸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 속에서 가정을 세우고 민족을 세우려고 열심을 내신다. 태의 문을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2절에서 야곱의 고백을 통해서 그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 30:2절,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창 30:17절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듯이 이렇게 말씀을 기록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그리고 창 30:22절에 가서는 그것을 아주 확실하게 증거해 놓았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여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열심을 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라헬을 불쌍히 여겨 주셨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정에 출산을 주관하셨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12 지파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사야 9:6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보내시는데, 그의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서 나라가 세워지고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궁극적으로 누구인지를 설명했다. 사 9:7절을 보면,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다.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인류 구원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선언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고 선언했다. ‘체바트 여호와 카나’, 만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셔서 모든 구원을 이루신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열심을 내신다.


그러므로 성도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면 된다. 우리의 믿음이 조각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열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힘들어 하고, 의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열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실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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