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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있어야 진짜 사귐의 자리로 들어간다.


만남이 있어야 진짜 사귐의 자리로 들어간다.(마 6:5-8)


기도가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해지면 진짜 신령한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 안에서 구할 때, 우선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왜 그것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구했을 때 우리가 받게 되는 상급이 과연 무엇일까?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1. 기도의 자리에서, 우선적으로 무엇을 구해야 할까?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기도란 영혼의 호흡이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과의 만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영적인 지성소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만난다. 그리고 문을 닫아걸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8절 말씀을 통해서,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기 전에’라는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헬라어로 보면, “구하기 전에”라는 말이 ‘프로 투 휘마스 아이테사이 아우톤’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휘마스 아이테사이 아우톤’ 이라는 표현인데, ‘네가 그를 구하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나? ‘그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에 해당하는 대상이 누구이겠나? 세상일까, 하나님일까? 세속의 욕망일까, 성령일까?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는 권력자들일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일까?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성령님이시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성도가 기도의 자리에게 우선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분이시다. 왜 그럴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계신다.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분들이 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고,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괴로운 분들이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지금,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은혜의 삶에서 멀어져 있다면, 바로 그것을 심각할 정도로 괴로워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서 간절히 구하고 찾아야 한다. 팀 켈러는 “기도는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성도란 그렇게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서, 주님을 붙잡기 위해서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2. 그러면, 왜 인격적인 만남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연하게도 인격적인 만남이 있을 때, 진지한 만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그렇지 않나? 어떤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데,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진지해지지 않던가? 사람을 만나서 인격으로 대하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자기 주장만 이야기하고, 명령하고, 형식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 서로에 대해서 진지해지고, 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왜 예배당에 나와서 앉아 있는데, 이 시간이 괴롭고 지루한 시간인가? 왜 기도하는 자리로 찾아들어가는 것이 괴로운 것일까? 왜 말씀을 듣는 것이 지루하고 피곤한 시간일까?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으면, 예배당에 나오는 것이 기쁨이 된다. 말씀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으면, 말씀이 꿀 송이보다 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자꾸 말씀을 찾고, 묵상하고, 배우게 되어 있다. 성령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시간과 자리로 찾아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분” 이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성령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기도의 자리가 기쁨과 만족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기도하는 자리가 진지한 만남과 교제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3. 인격적인 만남으로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지를 촉구하는 명령들을 수없이 많이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의지를 드러내야 하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명령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지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럴만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 명령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지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명령이란 곧 허락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하신 후에, 풍랑이 이는 밤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다.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던 베드로가 주님께 요청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그러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나? “오라” 였다. 그 말씀을 의지하고 베드로가 물위에 발을 내리자 어떻게 되었나? 물위를 걸었다. 비록 잠시 후에 물을 보고 두려워서 빠져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나?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명령하신 말씀, “오라, 물 위로 걸어오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잘 나고 능력이 있어서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명령은, 곧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명령과 허락이라는 조건이 주어져 있다.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면 명령하신 것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으로 말씀을 따르면 약속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허락받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누구의 허락이 중요한가? 주님의 허락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열쇠로 삼아서 기도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주님을 열쇠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구하고, 주님의 뜻 안에서 소망을 간구하면, 무엇이든지 열려지고 풀려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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