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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14_이 날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출 20:8-11)



기독교는 안식일의 최종적인 완성이 주일에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생으로 이끄신 복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구원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야 구속사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라, 성도들이 부활과 영생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안식 후 첫째날이 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의 최종 완성으로 본다. 이 날에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이 날에 하나님께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일이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할까? 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낼 때, 어떤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안식일의 모든 복이 임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과 은혜의 삶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 오늘은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초기 신자들의 고백에 담긴 은혜를 네 가지 면에서 말씀드리려고 한다.


1. “태양의 날(Sun-Day)”이라는 고백에 관한 것이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래로 가장 광범위하게 불려진 표현이다. 농경문화라는 배경 때문에 태양신을 숭배하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유대인들도 태양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어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태양”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일종의 종말론적인 신앙고백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의 끝이 오리라고 기대했다.


이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재림하시는 주님과 만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보내야 하겠나? 형제, 자매와 원수된 관계로 종말을 맞이할까 아니면 화목을 이루고 난 뒤에 종말을 맞이할까? 형제, 자매를 지옥의 심판과 저주 아래 내버려 둘까 아니면 그들을 주님 나라로 이끌어 올까? 여러분, 만약에 오늘이 세상의 종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주일을 맞이해야 할까?


이런 것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소망과 고백이었다. 종말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라도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언제라도 주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다. 마지막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만날 것인가?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끊임없는 고민이었다. 매주일이 되면, 종말론적인 고민 속에서 주님과 만났던 것이다.


2. “안식 후 첫날(The first Day of the Week)”이라는 고백과 관련한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 후 첫날”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창조를 여신 첫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날에 대한 고백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유대교와 논쟁하고 경쟁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박해했고, 예수님이 전하시는 진리를 외면했다. 그런 유대교에서는 한 주간의 삶을 다 살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성전에 올리는 진설병 떡도 안식일 전날 저녁에 진설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는 한 주간을 살기 전에 하나님께 예배를 먼저 드린다.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먼저 드린다. 그리고 나서 세상을 산다. 왜냐하면, 이 날이 “첫째 날, The first Day”이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날은 인생의 첫 단추를 끼우는 중요한 날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 먼저, 그리고 삶이 나중이다. 우리는 왜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처음 시간, 첫 번째 날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자기 존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한 주를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먼저 교제한 이후에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예배란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가 내린 예배의 정의는 이것이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행위이며,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도가 반드시 예배는 아니다. 그런데, 기도는 언제나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찬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찬양은 언제나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참된 설교는 언제나 예배로 이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설교이다. 설교가 설교자나 기타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채 끝난다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우리를 이끌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첫날을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시작한다. 엎드림이란 무엇인가? 굴복이다.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고,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한 주간을 시작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신다. 제사장이 안식일 전날에 진설병을 올려드린다고 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진설병 12개를 올려드린다. 그것이 일주일마다 행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진설병을 올리고 나면, 이전에 올렸던 진설병은 어떻게 한다고 했나? 제사장들이 그것을 가져다 먹었다. 무슨 말인가? 일주일 동안 진설되었던 떡이 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게 신비로운 것이다.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떡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떡이 상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주일에 자기를 드린 성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상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말씀이다.


3. “주님의 날(Lord’s Day)”이라는 고백과 관련한 것이다.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이라는 고백을 했을까? 바로 이 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예수님께서 이 날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세레트 핫데바림에서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안식 후 첫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인 것이다. 이 날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송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이 날은 구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파루시아’라고 하는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이며,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활의 날, 성령의 날’이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가 ‘여호와의 날’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기록했고,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의 성취가 선포된다. 그것이 행 2장에 기록된 말씀이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가 오순절, 곧 주일이었다. 이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부어 주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액케오’는 ‘퍼붓는다’는 의미가 있다. 여름 장마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퍼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미래형으로 사용되어서, 연속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모일 때마다 이런 은혜를 기대했다. 성령이 오순절에 부어지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주일마다 성령이 퍼부어지는 은혜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퍼부어지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행 2:17절을 보면,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성령의 임재 안에서 예언과 묵시와 꿈이 보여지게 될 것을 기대하고 사모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임재의 충만을 경험하고 세상에 나가서 담대한 믿음으로 살았다.


4. “제 8요일(The Eight Day)”라는 고백과 관련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볼 때, 7은 완전수이며 우주적인 숫자이다. 완전히 채워진 수를 의미하기 때문에 한 주간이 7일로 이루어진다. 한 주간이 7을 넘어서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이미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일을 “제8요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8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8이라는 숫자는 히브리 철학에서 완전수 다음으로 특별한 숫자이다. 8은 ‘초월의 수’이다.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례”를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도록 했다. 유대인은 할례를 통해서 중요한 의식을 경험한다. 그것은 태어날 때 자연인이었던 사람이 할례를 통해서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면, 거기에도 8이라는 숫자가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보시고는 지면에 있는 것들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노아를 불러서 방주를 만들게 하신다. 바로 이 방주에 탑승했던 노아의 가족이 모두 8명이다. 8명이 탑승한 방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죄악이 관영했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졌다. 8이라는 숫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지는 일종의 매개이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지게 하는 숫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 8요일”은 삶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열려지는 날,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일 아침이 되면, 성도는 한 주간 동안 살았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도마의 고백과 관련이 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만나셨는데, 그 자리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없었다. 이후 8일이 지나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있는 곳에 나타나 도마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이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결국 “제 8일”에, 주님은 세상과 부딪혀서 연약해진 우리 믿음을 자신의 옆구리로 초대하신다. 그래서 연약해진 믿음을 강하고 단단한 믿음의 반석으로 세워주신다.


그러니까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과 은혜, 성령과 사랑을 충분하고도 넉넉하게 받아 누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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