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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배고픔의 자리에서 기적을 보게 하신다.(마 14:13-21)


우리에게 없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와 병자의 공통점은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인데, 스스로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3절을 보면, 무리는 아무 대책없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살지만, 진정한 구원과 행복에는 대책이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길을 그냥 따라갈 뿐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봐도 대책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을 보십시요. 15절에서,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빈 들”이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요. 사람들이 “빈 들, 즉 광야”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광야와 같습니다. 빈 들입니다. 아무것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대책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는 능력도 대책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계획과 능력이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양식을 주실 계획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 모든 계획과 능력을 행사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픔과 배고픔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아픔과 배고픔의 자리에서 기적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픔의 자리에서 치유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아픔으로 인해서 평안을 잃었던 사람들이 평안을 회복했습니다. 배고픔의 자리, 굶주림의 자리에서 풍요를 체험했습니다. 20절을 보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려던 떡이 남아서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아픔에서 평안을 얻었고, 배고픔에서 배부름을 체험했습니까? 마 13장의 마지막 대목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당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 13:58절을 보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서 살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자 분봉왕 헤롯입니다. 마 14장이 시작되면서 헤롯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세례 요한을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은 율법을 대표하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것은 율법을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거부한 사람의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헤롯은 말씀을 부인했던 것입니까? 자기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왕인 사람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아십니까? 마 14장에서, 의도적으로 헤롯의 상태를 알려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정욕의 사람입니다.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차지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를 책망하니까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셋째로 그는 두려워합니다.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까 두려워합니다. 넷째로 그는 근심 덩어리입니다. 마 14:9절을 보면, “왕이 근심하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니까 근심합니다. 다섯째로 그는 자아와 세상에 딱 붙잡힌 사람입니다. 마 14:9절에서,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아가 내렸던 결정과 세상 사람들로 인해서 요한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왕이고 주인으로 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주인된 사람이 어떤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까? 정욕에 붙잡혀서 삽니다. 탐욕과 음란에 갇혀서 삽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고, 다투는 일에 앞잡이가 됩니다.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혀서 삽니다. 항상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자아에 붙잡혀서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세상에 붙잡혀서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세속적인 쾌락과 만족을 추구합니다.

없는 것에 불평하지 말고, 주신 것에 감사하라.


그런 상태로는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은 주님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대책은 없었지만, 그저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왔습니다. 이 무리를 대표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19절을 보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아나블레포’는 ‘위를 바라본다, 중심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위, 하늘 중심”을 바라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 집중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율로게센’은 ‘찬양하다, 좋게 말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가진 것이 초라하다보니까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100만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2만원이 있다면, 대부분은 가진 2만원에 감사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98만원 때문에 아파합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을 보고 축사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초라해도 그것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지시면 얼마든지 위대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것이 아무리 초라해 보인다고 해도,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기도하면 달라집니다. 연약한 건강을 주님이 만져달라고 기도하면, 주님이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물질을 주님이 만져주시면 풍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돌보셔서 기쁨과 감사가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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