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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꺾지 못하는 절대 진리와 사랑이 있다.



희망을 꺾지 못하는 절대 진리와 사랑이 있다.(창 23:1-4)


자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 그 삶의 서두가 2절 말씀이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했다”고 했다. 여기서 ‘슬퍼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리스포드’인데, ‘사파드‘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가슴을 치면서 소리를 내서 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한 단어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기 때문에 그렇게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 있다.


그 뒤에 따라나오는 “애통했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웨리브코타흐’는 ‘바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가 슬픔 때문에 우는 경우에는 ‘애도, 후회, 회개’ 등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가슴을 치면서 소리를 내서 울 때는 그렇게 되돌아볼만한 경황이 없다. 그냥 슬프고 안타까워서 막 우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후회하고 회개하면서 자기의 생애를 돌이켜 본다는 것은 감정이 절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로고스 주석에 의하면, ‘웨리브코타흐’는 ‘스스로의 감정을 자제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할까? 오늘 그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사라는 여성 중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있는 생애를 살았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사라가 정말 의미있는 생애를 살았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그렇다. 사라는 의미있는 생애를 살았다. 그녀의 생애가 언약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이삭이라는 아들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언약의 씨앗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씨앗 하나를 심고 세상을 떠나니까 “믿음의 어머니”라는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와 사라의 생애를 돌이켜 보니까, 하나님 나라의 씨앗 하나를 심기 위해서 세상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생을 살았다. 그러고 보니까 사라의 생애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세우는 씨앗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 남긴 흔적이고 의미였다. 이렇게 살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기냐는 것이다. 우리고 먹고 마시고 즐겼던 것들은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남긴 흔적은 의미가 되어서 후손들에게 이어지게 된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대강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다. 이틀이 지나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이 마 1: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의미가 있는데, 세상에 있는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교회를 오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세상을 살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시나?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자기의 생애에서 발견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의미가 하나님을 향해서 존재하시는 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보면서 ‘애통해 했다’고 했다. ‘웨리브코타흐’이다. 그는 사라를 보면서 자기의 생애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회개했다. 무엇을 회개했다는 것이겠나? 자기가 잘 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이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지금까지 60년 넘는 생애를 살아왔다. 그런데 그 생애를 돌이켜보니까 사라를 향해서 지은 잘못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자기의 잘못이다.


그렇게 자기가 잘못했는데, 누가 그런 잘못을 돌이켜 주었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잘못을 돌이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언약 안으로 계속해서 이끌어 주셨던 것이다. 자기는 연약한 본성을 이기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이끌어 주셨다.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성도란 이렇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성도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데,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알렸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성도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산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기는 하지만, 소망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이런 믿음을 가지셔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희망을 꺾지 못하는 절대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이다.


3. 영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이루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산다면, 성도는 날마다 변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끊임없는 변화의 삶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변해갔다. 아브라함이 늘 언제나 믿음의 용사다운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마다 자기를 하나님에게 굴복시켰다. 하나님이 횃불 언약을 요구하실 때 자기를 굴복시켰고, 할례의 언약을 요구하실 때에도 자기를 굴복시켰다. 이스마엘을 내쫓으라는 말씀에 순종했고,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마다 하나님께 자기를 드렸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영적인 삶이 날마다 발전해야 한다.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영적인 변화가 없으면 곤란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맡겨야 하는데, 여전히 내가 계산해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하면 안 된다.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한,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철저히 자기 중심, 자기 열심, 자기 노력으로 살았기 때문에 성령님께 문제를 맡기고 오직 순종만 한다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성령님께 기회를 드려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성령님에게 신앙 문제, 가정 문제, 직장이나 사업 문제를 맡겨 보시라. 여러분의 노력으로 해결 안 되던 문제들을 성령님께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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