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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에 따라서 나온다.(시 23:1-6)


시편 23편은 여호와로 시작해서 여호와로 끝맺는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해서, 6절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로 끝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편 23편에는 다윗의 인생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시 전체를 하나님께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이 시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감싸고 계셨다. 그 인생의 처음이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안에서 살았던 생애였다. 그런 인생이었기 때문에, 부족함 대신에 필요한 양식이 있었다. 두려움 대신에 평안한 쉼이 있었다.

다윗은 그것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다. 자기의 생애에서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고백하는 전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절에서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었다. 다윗의 인생에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자기의 인생을 품고 계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애에 좋은 일도 있고 슬픔도 있다. 영광스러운 일도 있고 부끄러운 일도 있을 수 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고 깊은 고뇌와 탄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생애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믿어야 한다.

1. 성도란 감사로 인생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고 할 때 상요된 히브리어 표현이 ‘로 에흐싸르’인데,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을 뒤집어보면, ‘아주 넉넉하고 풍족하다. 그래서 부족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완전히 만족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더 이상 영혼의 갈증이 없는 상태, 완전히 만족한 상태라고 고백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나? “여호와 로이, 즉 여호와께서 자기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윗의 외형적인 삶을 보면, 정말로 그가 모든 생애에 걸쳐서 부족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윗의 생애도 외형적인 모습만 따지고 보면 야곱이 고백했던 것처럼, “험악한 인생길”과 같았다. 4절에서 그는 그것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냈던 때가 많았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찰르마웨트’는 ‘죽음의 그림자, 죽음의 그늘’이란 뜻이다. 다윗은 자기의 생애에 ‘그림자’가 있었다고 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다윗의 인생에 있었다. 그 어두운 그림자란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지독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기의 생애가 만족스러웠다고 고백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살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자기 마음에 딱 들어맞아서 기쁘고 감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목자가 되셔서 양을 돌보듯이 그의 인생을 돌보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애에 ‘어둠의 그림자’가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성도란 자기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믿어야 한다.

2. 감사로 인생을 해석하면 감사가 늘어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애를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이끌어 가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사람으로 세우시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것을 4절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에 쓰인 “지팡이와 막대기”, 그리고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맹수로부터 지키는데 사용되었다. 목자는 양들을 위협하는 맹수를 지팡이와 막대기로 쫓아버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했다. 양들이 길을 벗어나서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하면,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툭툭 쳤다. 양들을 때리면서 바른 길로 가게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말의 이중적인 의미를 확인하면 더 정확해 진다. 히브리어 표현 ‘예나하무니’의 원형인 ‘나함’은 ‘위로하다, 안심시키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맹수들이 양들을 위협할 때,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안심시킨다는 것이다. 양들을 위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함’이란 단어는 ‘후회한다, 회개한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양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치면서 회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성도란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 마땅하며,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순종하기를 결정해야 한다. 5절 말씀이 이렇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양이 기름부음을 받으려면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모든 것을 목자에게 맡겨야 한다. 그렇게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어떻게 되겠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고 했다. 성도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면 된다. 무엇이든지 주님을 의지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앞서게 하시고, 그 뒤를 순종하면서 따르면 된다.

3. 감사로 해석하는 인생은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오늘 설교 제목이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감사란 어떤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재물이나 능력이 많다고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고 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윗의 인생 해석이 그런 것이다. 그는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그런데 늘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다. 다윗은 시 23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고 있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토록 따라다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나님 안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신이 “반드시” 따른다고 했다. “반드시”, 히브리어로는 ‘아크’인데, ‘의심할 여지없이’란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에게도 좋으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반드시 따른다. 그러니까 의심하지 않으면 된다. 확신하면 된다. 감사하면서 기도하며 살아가면 된다.

여러분, “감사”라는 말에는 기적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감사로 살기 원하신다. 이 마음을 가득 채우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보다 재난이나 위기를 더 많이 말하지 마시라. 위기 속에서라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라. 문제가 많을수록 기도제목은 넘쳐나게 마련이다. 기도제목이 많을수록 응답은 풍성해 진다. 응답이 풍성해질수록 기적같은 간증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문제가 많은 인생이라고, 문제가 많은 가정이라고 슬퍼하지 말라.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화려한 열매와 수많은 간증이 삶에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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