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영광이 되게 하라(골 1:24-29)


직분이 사명이다.

오늘 설교 제목이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하라”이다. 어떻게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할 수 있나? 이미 답을 가지신 분이 있고, 오늘 답을 가져야 하는 분이 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말씀”이 답이다. 말씀을 붙잡고 가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영광이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을 붙잡고 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 즉 말씀으로 자아가 죽은 사람들이 영광으로 간다는 말씀이다. 말씀에 답이 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은 고난이 아니라 “말씀”이다.

25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다. 헬라어 ‘디나코노스’는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시중드는 사람이다. 그런 일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일꾼이 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다. 이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이유가 있다. 25절에서 “직분”이라는 단어를 전에 읽었던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경륜”이라고 번역했었다. 헬라어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볼보는 직책이나 행위’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직책을 주신 분이 누구냐면 하나님이다. 이렇게 주어가 하나님일 때는 세상을 관리하는 일이 되니까 ‘사명’이 된다. 그래서 공동번역이나 새번역 성경에서는 “사명”이라고 번역했다. “사명”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혹은 경륜’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역한글에서는 ‘섭리, 즉 경륜‘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니까 “직분”은 곧 사명이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성도의 직분, 집사나 권사나 장로의 직분이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 사명의 목적이 결국은 하나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 목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저나 여러분이 다 교회의 일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꾼되게 하셨는데, 각 사람에게 사명을 따라서 일하게 하셨다. 그 사명의 목적은 하나이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성도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26절에 “비밀”이라는 거창한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29절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판타 안드로폰’이라고 했다. 무슨 뜻이냐면, “모든 사람”이란 뜻이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29절을 주목해서 보시라. 사람이 “완전한 자”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했다.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결코 완전한 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완전한 자”란 ‘결핍이 없는 상태,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부족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만 “완전한 자,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 신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다. 시 34편에서는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상태에서만 완전한 만족과 기쁨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가르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했다. 바울이 교회의 일꾼으로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도 똑같다. 여러분이 존재하는 목적이 그것이다. 우리가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것이다. 서로 가르치고 권면애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게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절)고 했다. 바울은 자기의 힘으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의 힘으로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산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고 했다. 헬라어 ‘에네르게오’는 영어의 ‘에너지’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성령의 힘, 성령의 에너지”로 감당한다는 뜻이다. 사명을 자기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힘을 주셔야 감당할 수 있다. 직분이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아니다. 성령께서 에너지를 주셔야 감당할 수 있다.

자기 힘으로 하면 실패한다.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복음을 전할 때 따르는 고난이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이루려고 하면 고난이 따른다. 그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고난을 끌어안고 간다는 뜻이다. 고난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자기 힘으로는 안 된다. 자기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은 고난을 끌어안으려고 하지 않는다. 고난을 밀어내려고 한다.

고난은 내 안에 무엇이 살아있는지 알게 한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신 적이 없으신가?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보면, 자기 안에 말씀이 채워져 있는지 자아가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참지 못한다. 그런데 억울한 일이 있다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전화해서 변명하면 억울함이 해소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이야기를 하면 억울함이 더 커지고, 문제가 더 커지고, 교회가 분쟁하고 다투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말씀이 채워지면 억울해도 고난을 끌어안고 간다. 억울한 일도, 수치와 모욕도, 고난과 환난도 끌어안고 간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나? 십자가를 지면서 억울한 죄를 다 뒤집어 쓰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땅하고도 당연하게 자기의 육체에 고난을 채우셨다.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40에 한 대가 빠진 39대의 태형을 맞기도 했다. 귀신을 쫓아주었다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다.

억울한 일도 기뻐하고, 괴로움도 환난도 기뻐하고, 자기 육체에 다 끌어안고 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렇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니까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보면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손해를 보고 환난을 당해보면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자아가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환난을 통과하는데 기쁨으로 끌어안고 갈 수 있으면 말씀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게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하는 비밀이다.

말씀을 가득 채우라.


25절에서, 바울이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다. 헬라어 ‘플레로사이’는 ‘가득하게 하려 한다, 완전하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가득하게 되어서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말씀이 가득하게 되는가? 흘러넘쳐야 되지 않나? 말씀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안에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고, 충만한 말씀이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사명이다. 직분의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흐르게 해야 한다. 복음이 흘러가도록 복음전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가득하게 하고, 완성되게 해야 하는 한다. 여기에는 고난이 따르고, 억울함도 따르고, 수치와 모욕도 따라 붙는다. 그런데 바울은 고후 7: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성경에도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는지 잘 보시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다. 요셉이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끌어안고 산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은혜를 체험한다. 능력도 체험한다.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열심히 전하라는 것이다. 말씀이 흘러가게 하고, 가득하게 하고, 이루어지게 하라는 것이다. 입술을 열고 삶을 보여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라는 말씀이다. 자기의 욕망이 흘러가게 하지 말고, 말씀이 흘러가게 하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난이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