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눈은 다툼으로 가고, 좋은 눈은 사명으로 간다.(마 11:11-19)



좋게 보여야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나쁜 눈은 다툼으로 가고, 좋은 눈은 사명으로 간다”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나쁜 눈이 되느냐, 좋은 눈이 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신앙이 달라지고, 구원받는 삶이 달라지고, 미래가 달라집니다. 야곱은 사기꾼 기질을 가진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좋은 것을 볼 줄 알았습니다. 성도가 그렇게 좋은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쁜 눈은 자기 마음대로 보려는 눈입니다. 반면에 좋은 눈은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좋게 보여야 역사가 일어나고 했습니다. 목사가 좋게 보여야 설교가 제대로 들리고, 교회가 좋게 보여야 교회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사람이 좋게 보여야 믿음이 가고, 성도가 좋게 보여야 교제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고난도 좋게 보이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좋게 보이는 것은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 인생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명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신앙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라는 말은 “세례 요한이 천국에 대해서 선포한 이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 복음을 선포한 이후로, 사람들이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침노하는 자”라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가 ‘비아스타이’입니다. 복수형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침노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침노하는 자들”, 즉 ‘비아스타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예수님께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진하게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즉 사명의 일꾼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비아스타이’를 부정적으로 보면, 세례 요한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공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즉, 다투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했습니다. 말 4:5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시고, 그 길을 준비한 엘리야와 같은 자가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사람들이 천국 복음을 보지 않습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응하지 않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굳어 있는 마음, 완악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굳어 있으면 안 됩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으로 반응해야 한다.


계시록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 다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교회에 없는 것을 책망하시려는 의도, 혹은 그 교회에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려는 의도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14절)로 나타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아멘”이 없고, “충성”이 없고, “증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칭찬이 없고, 책망만 있습니다. 사데 교회도 책망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계 3:4)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타락했습니다.

그 출발이 “아멘”의 실종입니다. 교회에서 “아멘”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을 보고 들어도 반응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멘”이 사라지니까 “충성”이 사라집니다. “충성”이 사라지니까 더이상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세대가 반응이 없는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완악한 세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악한 마음이 되어서 반응이 없으니까 어떻게 나갑니까? 다툼으로 나갑니다. 18절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은 금식한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다투려는 마음만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에게는 금식한다는 이유로 다투고, 예수님에게는 먹기를 탐한다고 다투는 것입니다. 이게 완악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이 좋아서 침노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미워서 침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좋고 구원받는 것이 좋아서 예수님께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미워서 예수님을 침노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남이 보게 하시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천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마음을 성경은 “완악함”이라고 했습니다.

“완악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포로세이’인데, ‘단단하게 굳어져서 둔해진 마음’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하자크’인데, ‘고집하다, 단단히 묶다’는 뜻입니다. 왜 사람의 마음이 굳어집니까? “고집”때문입니다. 자아가 이끄는 고집대로 마음을 묶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아의 고집대로 마음이 묶여지니까 굳어져 버립니다. 둔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훼방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라.


그런 마음의 완악함이 풀어져야 합니다. 왕하 5장을 보면, 아람 군대의 나아만 장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이 사랑하고 아끼던 존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을 때, 여종의 이야기를 듣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에 갔을 때, 엘리사가 나가보지도 않습니다. 사자를 보내서,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 5:10)고 전합니다.

나아만이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왕하 5:11절에서,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라고 합니다. 중요한 표현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는”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자아의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들어서 나병을 거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 엘리사의 행동이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 자기 생각이 분노를 일어나게 했습니다. 자기 생각이 엘리사의 말을 무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내 생각에는”이라는 자아를 붙잡고 갔으면 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그는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왕하 5:14절을 보면,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내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도 “내 생각”을 자꾸 붙잡고 갑니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여러분은 망하게 합니다. 잠언서 말씀처럼,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여러분을 이끌고 갑니다. 내 생각으로 보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을 붙잡고 가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고 가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평안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인생이 사명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