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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를 탓하지 마라, 누가 쓰느냐가 관건이다.(15:22-27)

나무 하나도 역사가 되게 하신다.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실 때 사용하신 도구가 “나무” 하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에츠’라고 되어 있는데, 그냥 “나무”라는 뜻입니다. 어떤 나무인지, 얼마나 큰 나무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냥 ‘에츠’(즉, 나무)입니다. 이 나무 하나로 20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식수를 만들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을 바꾸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물을 치료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라는 것이 생명의 근원인데, 그것을 치료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치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흐와 로페에카’ 즉,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이다.

오늘 스토리를 전체적으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넌 후에, 광야로 들어가서 처음 만난 사건이 ‘마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홍해의 사건을 “세례”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고전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어디로 가게 되었습니까? 광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시련과 연단의 땅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 광야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련이 ‘마라’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가야할 곳이 광야이고, 그 인생이 “쓴 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광야가 시작입니다. 이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실패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야 하고, 말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인도를 받아야 신앙생활이 달아집니다. 예배 시간도 달고, 봉사와 헌신도 달고, 기도와 말씀의 시간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으면, 만사가 ‘마라’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쓰고, 봉사와 헌신도 쓰고, 기도와 말씀의 시간도 쓰고 괴롭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날마다 더욱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생활의 기쁨과 열매가 따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불평하지 마라, 믿음으로 이겨내라.

인간의 본성은 연약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흘길을 걸으면, 물을 얻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어 ‘마체우’는 ‘발견하다, 얻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물을 찾아야 하는데, 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지 못했을 때 원망이 일어납니다. 홍해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한 지가 3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고도, 자기에게 만족이 되지 못하니까 원망이 나갑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고 있는데, 원망이 그냥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연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출애굽기에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애굽의 군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벽이 너무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나님보다 크게 보이니까,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세상을 너무 크게 보지 마십시요. 세상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요. 그래서 세상의 작은 성공들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됩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과 만족, 달콤한 유혹들 때문에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으로, “마라”에서는 사람들이 왜 원망했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물을 찾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싸’는 ‘질이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연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연단을 통해서, 신자가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어두운 터널처럼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재산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때로는 사업이나 직장 생활을 풀리지 않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자식들이 험난한 길을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건강을 잃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게 “마라”입니다. ‘인생의 쓴 물’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려 주시려는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라도 시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연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건강이라는 환경을 건드리시고, 때로는 재물이라는 환경을 건드리시고, 때로는 가족과 이웃이라는 환경을 건드리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시험이나 환난을 만났을 때,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시험, 그 연단을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


그러면, 어떤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까? 그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믿음이고, 하나는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25절을 보십시요.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고통 중에 도움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물이 없다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불과 3일 전에 홍해를 건너게 하신 기적의 한나님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것이 모세로 하여금 아프게 했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부르짖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쓴 물 옆에 있던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나무를 ‘마라’로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순종이 나갑니다.

그렇게 나무를 던져서, 나무가 쓴 물 안으로 들어가자 단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혹시 십자가가 보이십니까? 나무 하나가 쓴 물로 들어갔더니 단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광야이고, 마라의 쓴 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무 하나가 들어오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십자가 나무가 여러분 인생 안에 들어오면서, 단 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서 주인이 되시면,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능력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쓴 물인 ‘마라’가 희락의 단물로 바뀌고, 구원과 영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실, 나무 하나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세가 던지 나무에 주목하면 안 됩니다. 나무를 통해서, 나무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나무 하나를 하나님이 붙잡으시니까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도구를 탓하지 마라, 누가 쓰느냐가 관건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도구란 여러분의 인생에 주어지는 도구이기도 하고, 여러분 인생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인생의 도구가 주어지든지 탓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인생 자체가 어떻든지 탓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인생을 붙잡고 계신 분이 누구이신지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붙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누가 계신다고 했습니까? 우리 주님이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게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 임재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니까 나무 하나가 물 전체를 바꾸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20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물로 바뀌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여러분의 인생을 쥐고 흔들면, 여러분의 인생도 그런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는 존귀한 자들이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라의 쓴 물’을 ‘희락과 기쁨’으로 바꾸는 사람들로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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