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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일하지만, 하늘에 기록되게 하라.(요 6:60-69)


[성전꽃예술 해설: 매년 하반기가 시작되는 맥추감사절 주일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 큰 믿음으로 하반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요한 크리스소톰이 했던 말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성직자의 사역은 땅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하늘나라에 기록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이 땅에서 이루진다 고 해도 하늘 나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일이, 이 땅에서 살아지고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모두 하늘에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대목을 읽었습니다. 이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 제자들과 무리들이 떠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서 떠나는 자가 아니라, 말씀 과 연합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 기록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요한복음 6장을 전체적으로 보면, “부활이 무엇이고, 영생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부활과 영생으로 나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세대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 6: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말씀하시는데, 요 6:53절에 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요 6:27절에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구하고 원하는 것은 썩을 양식입니다. 그런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 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니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무엇을 먹으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체를 먹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의 처음 스토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요 6:9절에서,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 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한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온 모습은 예수님의 외형을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형이 무엇과 같습니까? 마치 “보리떡”과 “옵사리온”을 닯아 있습니다. “물고기”로 번역된 헬라어 ‘옵사리온’은 물고기로 쳐주지도 않는 ‘작은 고기’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원문에는 두 마리가 아니라 두 토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보리떡”은 보잘 것 없는 양식입니다. 이것들은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셔서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연약한 예수님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를 남길 만큼 차고 넘치는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주목하라고 했습니까? 기억하십니까?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주목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아이를 먹어야 합니까? 한 아이가 들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먹어야 합니까?” 당연히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 아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들고 왔던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 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예수님 자체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들고 축사 하신 것(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품고 있는 것)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품고 있었습니까?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담고 계셨던 말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담고 계셨던 말씀의 기초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들어서 축사하셨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입니다. 5와 2라는 숫자를 생각해 보십시요. 유대인들에게 5라는 숫자를 말하면 금방 알아듣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로 “토라”(즉, 모세 오경)이라고 습니다. 그리고 2라고 하는 숫자 역시 단번에 알아듣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증거의 수, 증인의 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 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해서 반드시 두 명의 증인이 있어야 법적인 효력을 발휘합니다. “아세레트 핫데 바림”을 ‘십계명‘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을 “증거의 말씀”이라고도 합니다.(두 돌판에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병이어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고 축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담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 오경이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는 5권의 책이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 오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 그것을 먹는 것이 영생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담고 계신 말씀이고, 전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먹고 말씀과 연합되면, 영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 심오한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해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집으로 삼아서, 우리 안에서 머리로 있고 싶어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창세기의 스토리라고 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나는 호두껍질 속에 갇혀 자신을 무한공간의 제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악몽을 꾸지 않는다면.”이라고 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셰익스피어의 말은 지극히 옳다. 우리는 호두껍질 속에 갇혀 있으면서, 동 시에 우리 자신을 무한한 공간의 왕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작은 호두껍질과 같은 것에 갇혀 살면서도, 자기가 왕이 되려는 본능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기 가 왕이 되어서,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생각과 말 들을 호두껍질에 붙여 가면서, 그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 하고,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나는 옳다, 나는 정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하 고, 논리도 만들고, 스펙도 쌓아 갑니다. 자기의 주인 됨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자기의 삶의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요. 60절에서,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들을 수 있겠냐?”고 했습 니다. “듣는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쿠오’인데, 히브리어 ‘샤마’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은 “경청한다, 깊이 새겨서 듣는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샤마’는 ‘순종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순종이란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여야 순종이 됩니다. 헬라어 ‘아쿠오’가 그런 뜻입니 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0절 말씀은,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주목해서 보십시요.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라고 했습니다. “제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마떼 테스’인데, ‘초신자’가 아니라 배움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 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길을 오가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제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66절을 보면, 더 충격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66절을 보십시요.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갔다”고 했는데,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는 ‘버리고 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물러났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신뢰를 멈추라’는 말씀입니다. “부인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르네오마이’는 ‘거절한 다, 비난한다, 포기한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거절하는 것, 자기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예수 님을 수용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생각이나 내 의도와 맞지 않아도, 내 생각과 내 의도를 거절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자기부인, 자기죽음, 자기포기’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볼 때,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기를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구나. 내가 계획하고 내가 믿어온 내 능력과 젊음이라는 것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런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와서 자기를 다스리도록 자기를 내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내어드리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A.W. 토저 목사님이 진정한 복음을 전해 들으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울면서 회개하는 것이고, 하나는 복음에 대해서 폭도가 되는 것이다.” 복음이 복음으로 전파되면 둘 중에 하나의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굴복해서 회개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든지, 폭도가 되어서 말씀을 비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재정도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재정이 채워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도 두 가지 반응밖에 없었습니다. 통곡하며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여전히 왕으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데, 자아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붙잡기 때문입니다. 64절을 보십시요.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아 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아도, 믿지 못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 해하기 어려웠다면, 다시 주님께 배우면 됩니다. 그들은 믿지 못해서 떠난 것입니다. 믿지 못하고, 순종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난 제자들이 다시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은혜로 충 만하고, 어떤 사람들은 시험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데, 어떤 사람은 냉랭한 심령의 비판자가 되버립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자기를 붙잡느냐, 말씀을 붙잡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떠나고 남아 있는 열 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67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68절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으로 보였습니다. 진짜 생명의 말씀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진짜 생명인 것이 믿어졌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붙잡아도 “썩어질 생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말고, 누구에게로 가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영생의 말씀, 진짜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지시하는 바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갈 것입니다. 시험이나 환난으로 인해서 그럴 것입니다. 자기 만족과 성공을 위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떤 때에라도, “너희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실 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하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살아낸 삶이 하늘의 기록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썩어지고 없어질 허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구주 예수님을 붙잡고, 말씀을 붙잡고, 진짜 생명의 삶을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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