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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뜻밖의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창 29:1-9)


우리는 지금, 야곱의 생애를 읽어나가고 있다. 야곱의 생애가 광야같은 고난과 시험의 무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런 광야같은 인생이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그리고 야곱은 계속해서 길을 떠난다. 그렇게 길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가는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다스려나가시는 은혜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어떤 은혜였던가를 세 가지로 살펴보려고 한다.


1. 야곱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벧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야곱은, 그곳을 떠나 하란으로 향했다. 1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여기서 “야곱이 길을 떠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잇사 야아코브 라그라이우’는 직역하면 ‘그리고 야곱이 그의 두 발을 들어올렸다’는 뜻이다. 야곱이 자기 발을 계속해서 들어 올렸다는 말씀이다. 야곱이 길을 가는 모습을 설명하는데, 그의 발을 계속해서 들어 올렸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말씀처럼, 그는 쉼 없이 자기 발을 들어올렸다. 벧엘에서 하란까지는 700km 정도가 되는 거리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데, 쉬지 않고 게속해서 발을 들어 올리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긴 거리를 여행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지 않은 위협과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발을 들어올렸다. 야곱은 700여 km를 여행하는데, 계속해서 자기 발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강도를 만나거나 질병 때문에 발을 들어 올리지 못할 만한 상황을 만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계속해서 자기 발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사건들도 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야곱이 확률적으로 라헬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져가고 있다.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잠 16: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야곱이 어떤 길을 가든지 지금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지금 야곱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야곱이 생각할 때는 우연이 중첩되고 있다. 뜻밖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계획이 있었다. 성도란 이렇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2. 시련의 길에서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야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시련의 길로 다스려나가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거칠고 고된 시련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 그것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단련받는 삶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야곱을 단련하려고 하시나?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전에 시련으로 단련하시는가? 그가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쓰시려는 사람의 변화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변화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 오면, 그 상황이 변화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들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에 더 관심하신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르다. 사람들은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면 신속하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속도보다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더욱 깊게 관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란 것이 원하는 것처럼 빠르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라도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힘도 능력도 공급해 주신다. 환난과 시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환난과 시험을 극복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내면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사모하는지 관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아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도록 마음과 영혼을 다스려야 한다.


3.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하시는 은혜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면, 마땅히 성도는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호세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다. 망한다.”고 한다. 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방탕하게 살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산다. 그것이 망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호세아서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벽 빛깥이” 어김없이 자신을 체험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을 때, 그들의 역사는 다 끝난 것처럼 보였다. 성전이 허물어지고 나라가 멸망당했다. 민족이 말살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기 저기로 흩어졌다. 그나마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신앙의 터전도 빼앗기고, 나라도 잃어버리고, 가족도 민족도 모조리 빼앗겼다. 겉으로 보면, 남은 것이 있었던가? 다시 회생할 가능성이 있었던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몰락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끝장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이 끝났던가? 천만에 말씀이다.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다시 일어났다. 400년 만에 메시야가 도래했다. 그리고 2000년 만에 민족도 일어나고 국가도 일어났다. 그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물리적인 원동력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하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내려고 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운명에 적용해서 행동하고 계획하고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고, 허물어진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자신들이 아는 하나님을 인생과 민족적인 삶에 적용시키면서 살았다. 그랬더니 가족을 일으키고, 민족을 일으키고, 국가를 일으키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축복이요 승패의 관건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되고, 그 목적에 맞게 행동할 방향과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길과 같은 길을 걸어가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인생의 모습을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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