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깨어있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마 10:24-33)


알면 두려움이 사명으로 흘러간다.

오늘 설교 제목이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입니다. 말씀에 깨어 있다는 것은 “말씀을 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알고, 말씀에 확신이 서 있다는 뜻입니다. 왜 두려운 것입니까?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미래가 두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알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 이후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죽음도 질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질병도, 죽음도, 죽음 이후의 세계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에서 심판까지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도를 이미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알고, 말씀을 믿고, 말씀을 의지하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집 주인인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주인, 귀신의 왕’이란 뜻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탄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 12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고 했습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요. 그렇게 “집 주인, 즉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비난하는데, “그 집 사람들, 즉 제자들”은 오죽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27절에서, “광명한 데서 말하며...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깨어 있으면 두려움이 아니라 사명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대화를 시도하라.

카일 아이들먼의 “한 번에 한 사람”이란 책을 보면, 영적인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내 삶은 별로 모범적이지가 않아서 섣불리 나설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나는 전도에 서툴러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나는 말을 잘 할줄 몰라서 신앙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상대방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곤란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영적인 대화, 복음전도”를 수시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영적인 대화”나 “복음전도”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이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입니다. “나는... 나는... 나는” 이에 대해서 카일 아이들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일은 궁극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이유는 변명에 불과하다. ‘내’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통”입니다. 세례 요한이 고백했던 것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소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마음을 움직이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카일 아이들먼이 이슬람 선교사님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사님이 몇 사람을 전도합니다. 그 후에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합니다. 이 명단에는 그 사람이 아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가운데 그들이 예수님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기를 죽일 가능성이 가장 낮은 열 명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 막 복음을 영접한 신자들에게 그 열 사람을 최대한 빨리 전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카일 아이들먼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받은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낸다. 자, 이제 당신에게 숙제를 내겠다. 당신 주변에서 당신이 예수님을 전했다는 이유로 당신을 죽일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 열 명을 찾아내라. 그런 다음, 그들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영적인 대화를 시도하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확신하라.

이런 신앙의 결국을 위해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면서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체면을 세우고 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외식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체면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참새 하나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잃어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인가가 일어나려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망하게 하려고 허락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들어오는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하셔서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화려한 그림, 훌륭한 작품에는 밝은 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색도 있고, 무채색도 있습니다. 아무런 터치가 없는 빈 공간도 있고, 밝고 화려한 색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합력해서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단번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들어주셨다면, 우리는 매우 빈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 삶에 있어서는 안 될 이기주의 등을 다루기 위해 가끔 응답을 미루시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기심, 허영, 율법적 자아를 다루시려고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대로, “하나님 나라에서 여러분이 더 완전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려고 이끄시는” 섭리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러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 붙잡히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혀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32절과 33절에서 핵심은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시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시인하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드러내라, 나타내라,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예수님을 드러내고,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의 실패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