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사람의 길에는 간증이 따라온다.(시 1:1-6)


찰스 스펄전은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잠 24:19-20절을 보면,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래”라는 말이 히브리어 ‘아하리트’인데, ‘미래’라는 뜻도 있고 ‘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악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끝이 없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전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했나? 잠 23:17-18절을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의인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끊어지지 않는 소망 안에서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이 간증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1. 말씀이 진리가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다. “복 있는 사람”의 길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에서 복이라고 할 때 대표적으로 말하는 단어가 ‘바라크’라고 했다. 바라크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과 같은 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바라크’가 아니라 ‘에쉐르’란 단어이다. 히브리어 성서로는 시편 1:1절 말씀이 ‘아쉬레 하이쉬 아쉐르’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쉬레’가 ‘에쉐르’의 복수형 단어이다. 직역하면 ‘~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혹은 ‘복들이 있도다 ~하는 사람은’이라는 뜻이다. ‘에쉐르’는 ‘바라크’와 구별되는 ‘복’이란 뜻의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을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에쉐르’는 ‘곧다, 솔직하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에쉐르’는 ‘똑바로 걸어가는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고 목표가 있다. 그 정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에쉐르’이다.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절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악한 생각을 가지고 걸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빠른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과 목표가 있는데, 거기에서 벗어난 곳에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맞은 편에 정면으로 대치해서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맞은 편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서지 않는 상태이다. 그것이 바로 ‘에쉐르’, 곧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맞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말씀의 편에” 선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말이 같은 맥락이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여기서 “오만한 자들”이란 ‘조롱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도를 조롱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않고, 성도를 조롱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이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목표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게 진짜 “복 있는 사람”인 것이다.

2. 말씀이 삶이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의 존재 상태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2절 말씀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즐거워하여”라는 단어가 ‘헤프초’인데, ‘기쁨, 소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소유격’ 표현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기쁨, 그의 소원’이란 뜻이 된다. “복 있는 사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소원, 자기의 기쁨으로 간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악인들은 세속적인 꾀를 생각하는데,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그들은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자기의 기쁨이며 소원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원으로 품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나? 기억하시나? 여러분이 마음에 어떤 소망이나 소원을 가득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나? 그 소원이 입에서 흘러 나오게 되어 있다고 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소원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의 뜻이라고 했다. 여기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흐께’의 원형이 ‘하가’라는 단어이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중얼” 이야기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본래 ‘하가’라는 단어는 의성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어떤 의성어라고 했나? “비둘기가 우는 소리”라고 했다. 우리는 비둘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 ‘구구구구’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비둘기가 우는 소리를 ‘하가하가’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들이 짓는 소리를 ‘멍멍’이라고 듣고 표현한다. 미국 사람들은 ‘바우와우’라고 듣고 표현한다. 이렇게 듣고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 히브리인들이 비둘기 우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 ‘하가’이다.

비둘기는 입만 열면 ‘구구구구’ 같은 소리만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말씀이 자기 안에서 소원이 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기쁨이 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비둘기가 입만 열면 ‘구구구’하는 것처럼, 일을 열었단 하면 ‘말씀, 말씀’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에 “하나님”밖에 없는 사람이다. 생각으로도 소원으로도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입만 열었다 하면 말씀이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말씀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하신다고 했나? 3절을 보시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놀라운 말씀이 지금 선포되고 있다. 사막과 같은 곳에 심겨진 나무도 물가에 닿아 있으면 열매를 낸다. 물가에 닿아 있으면 메마른 땅에서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약속의 길에도 고난과 시련이 있다. 고난, 시련, 배신, 실패와 같은 것이 약속의 길을 막아선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에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약속의 길을 가게 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언약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찰라흐)이라고 했다. 이렇게 형통하게 되니까 그 인생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나? 6절에 보니까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했다.

히브리어로 시편 1편을 읽으면, 알파벳 첫 글자로 시작해서 마지막 글자로 끝을 맺는다. 1편의 첫 단어가 ‘아쉬레’인데,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음인 ‘알레프’로 시작한다. 마지막 단어가 6절에 나오는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토베드’인데,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알레프로 시작해서 타우로 끝나는 시이다. 알레프는 ‘하나님’을 뜻하는 글자이고, ‘타우’는 끝을 이야기하는 단어인데, ‘완성’을 의미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언어적 유희를 가미해서 시편 1편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의미가 보여진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대목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끝”이란 그냥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이기도 하고, 소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미로 그것은 완성을 의미한다. 악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라.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않는다. 4절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다. 악인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형통함이 없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5절에 따르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의인들은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백성이 된다. 그러나 악인들은 심판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결국은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못한다. 미완의 삶, 심판과 저주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악인과 죄인의 결국이다. 반면에 의인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에는 간증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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