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들고 있는 초막을 깨라, 산에서 내려 가라.(마 17:1-13)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모든 일을 다 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비천에 처했을 때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가 쓰러져 죽을만큼 힘든 고난을 통과할 때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풍부에 처했을 때나 가난에 처했을 때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의술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치명적인 질병을 끌어안고 살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감당해 내고, 수치와 두려움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니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능력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모든 일을 감당해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모든 일들, 염려하게 하는 모든 일들, 두려움에 빠지게 하거나 실망감에 빠지게 하는 모든 일들을 능히 감당해 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려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자기부인”입니다. “율법적 자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을 보면,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데,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보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모세이고, 엘리야일까요?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가 선지자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롬 3:21절을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으신 분입니다. 메시야이신 것을,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영광을 말해야 합니다. 그게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말했습니까? 눅 9장을 보면, 두 사람이 예수님과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눅 9:31절을 보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했던 말씀이 이야기의 주제였던 것입니다.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입니다.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구하라.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짓자고 말했습니다. 5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며, 베드로는 죽음보다 영광이 좋았습니다. 이제 곧 초막절인데, 초막을 지어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인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뒤에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으로 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냥 여기에서 영광만 보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의 자아가 그렇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님을 위한 초막도,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도 아닌 것입니다. 그냥 자기를 위한 초막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초막을 짓겠습니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대학을 가게 해주세요. 고소득 연봉을 받게 해주세요. 직위를 갖게 해주세요. 직급을 얻게 해주세요.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주세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얼마의 감사헌금으로 끝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복음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동료난 이웃들이,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자기를 다 주셨는데, 우리는 얼마의 돈 말고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한 것이지, 주님의 영광이 아닌 것입니다.

또 고난은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영광을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이 없는 영광을 따라가려고 하면, 신앙은 타락합니다. 그것은 선교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것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이 해외선교도 하고, 농어촌선교도 합니다. 그게 자기가 부인되는 과정이라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물론 일정 부분은 그게 맞습니다. 자기의 시간과 재물과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자기부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 고난의 길도 아니고, 초대교회 신자들이 따랐던 십자가의 길도 아닙니다. 선교를 하는데,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높아집니다. 선교사님들에게 대우받고, 현지인들에게 대우받으면서 선교합니다. 다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서 음식을 즐기듯이 선교를 즐기고 돌아옵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높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진짜 연합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몇 일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신앙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의 신비이신데, 즉 계속해서 불타도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이신데, 우리는 사그라집니다.

그렇게 차려진 밥상 말고, 자기가 밥상을 차리는 곳으로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불신 세상과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따라붙습니다. 자기 부인이 따라옵니다.

초막을 깨뜨리라.


여러분 안에 여전히 붙들고 싶은 초막이 있습니까? 안주하고, 머물고 싶은 그런 초막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만 취하고 싶은 그런 초막이 있습니까? 말씀을 율법적 자아의 의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그런 초막이 있습니까? 그런 초막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율법적 자아의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사명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초막이 있다면 그것도 깨야 한다. 십자가를 외면하게 하는 초막이 있다면 그것도 부서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요.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마태의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눈에 예수님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산을 내려올 수 있습니다. 산을 내려와서 주님과 함께 사명의 길, 능력의 길, 치유와 회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나의 한계가 보이고, 세상의 벽이 보이고, 개인의 영광이 보이면 산을 내려오지 못합니다.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나타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즉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삶이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