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거라사’라고도 하는 가다라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무덤 사이에서 지내던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다. ‘다이모니조메노이’는 ‘다이몬’(즉, 마귀)에 붙잡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마귀에 붙잡혀 있으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반역하는 상태이다. 공중권세 잡은 마귀에게 붙잡혀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28절에서,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고 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만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엡 2:2절을 보면, 바울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의 인간에 대해서 말했다. 인간은 이 세상 풍조를 따라갔다. 그 뿐이 아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했는데, 이는 마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전에,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종 노릇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이다.
본래 인간은 누구도 구원받을 자격을 가지지 못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구원받을 만한 어떤 자격도 가지지 못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돼지 떼에게로 귀신을 옮겨버리신다. 그의 죄와 허물,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들의 실체를 돼지 떼에게로 옮겨버리신 것이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과정을 보라. 당시 유다를 다스리던 로마나 이방인들의 주요한 수입원이 돼지 사육이었다. 가다라 지방은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이었다. 여기서 돼지 떼가 몰살되게 하신다면 예수님의 입장은 난처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계하고 쫓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리고 그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몰사하게 하셨다.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5장에서는 돼지 떼가 2,000마리나 된다고 했다.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실 때, 2천 마리의 돼지 떼를 죽게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2천 마리의 돼지 떼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라고 하셨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천하를 가지는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온 천하를 다 얻어도 생명이 구원받지 못하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34절을 보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했다.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나게 했다. 귀신들린 사람을 구해주었으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세주가 되신다. 자기들이 두려워하던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니까 주님은 구원자가 되신다. 그러면 주님을 붙잡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완전히 반대로 나갔다.
사람들이 그와 같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세상에 붙잡힌 사람들이 다 그와 같다. 재물에 붙잡힌 사람들이 그렇다. 세상 권력에 취한 사람들이 그렇다. 자기들이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예수님을 부인한다. 자기들에게 피해가 생길 것 같으면 예수님과 관계없는 것처럼 산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보다 자아의 만족과 잠깐의 쾌락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셨겠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한 본성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명성에 집착하지 않으셨다. 자기가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로지 귀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에 관심하셨다. 죽어있는 영혼이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에 관심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사랑이다.
사랑하면 달라진다.
오늘 설교 제목이 “사랑은 이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오해하시면 안 된다. 모든 싸움에서 이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전제이다. 싸워서 이겨야 하는 싸움이 있다. 마귀와의 싸움, 질병과의 싸움, 세상과의 싸움에서는 이겨야 한다. 그런데 “사랑”을 전제로 하면 달라져야 한다. 사랑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부부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바보같은 사람이다. 부부 싸움은 이기면 지는 것이다. 상대를 내 뜻으로 제압해 버리면 반드시 그 화가 돌아오게 되어 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이기면 안 된다. 성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지 주님을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 헨리 블랙가비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고 했다. 무엇이라고 했나? “No, God.”이라고 했다. “안돼요, 주님”이라는 단어는 함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도는 언제나 “Yes, God”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순종이다.
사랑하면 언어도 달라지지 않나? 남자와 여자가 사랑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무엇인가? “내가 더~”라는 말이다. 남녀관계에서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말이 있다. “내가 더~”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어가 바뀐다. “내가 더 사랑해, 내가 더 미안해, 내가 더 고마워.”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내가 더 사랑하고, 내가 더 고마워하고, 내가 더 미안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다. 지는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이 그런 것이다. 귀신들린 사람의 영혼까지도 사랑하셨다. 그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주님을 저주하는 자이며, 주님의 길을 방해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에 붙잡힌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낮추셨다. 이게 주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가 무엇을 보여주는가? 십자가에서 자기를 아낌없이 내주실 정도로 영혼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이나 제가 그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전부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주님에게 이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일부는 인정하면서, 나의 구세주와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전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도란 주님을 일부가 아니라 전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권자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의 창조자가 되시며, 통치자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시며, 나를 심판하실 심판의 주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그 분의 일부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전체를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도 믿어야 한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라고 하셨다. 주님을 이기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 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방향과 선택과 목적을 내가 정하고 있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재물과 소유를 자기만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면 주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의 이름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태로는 성령으로 충만할 수도 없고, 은혜를 풍성히 받아누릴 수도 없다. 그 분의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모든 지성과 인격과 성품과 삶의 영역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다 그런 그리스도인,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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