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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을 맡기면, 위로부터 능력이 임한다.(롬 2:1-11)


[성전꽃예술 해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50일째날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우리 죄를 바라보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데,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봅니다. 그래서 십자를 보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죄 많은 우리 모습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성도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런 겸손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 도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교회 교인들 중에서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이었습니다.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단, “판단한다”는 말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헬라어로 ‘크리논’인데, 여기서 “재판관”에 해당하는 ‘크리테스’가 나왔습니다. 이 말을 마음에 두라는 것은, “재판의 목적”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재판”에 대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둘로 구분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 즉 “아세레트 핫데바림”을 크게 둘로 보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기준으로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비방’이나 ‘판단’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기준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마 7장을 보면, 예수님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비판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비판”은 긍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단에 대해 서는 비판해야 합니다. 동성애와 같은 죄에 대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비판하라는 말이 아니라 죄를 비판하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기독교가 사람을 혐오한다, 동성애자를 혐오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혐오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동성애”라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죄와 멀리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예수님이 비판 자체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응하는 자기비판은 하 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정죄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바로잡는 것 자체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바로잡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을 정죄하신다”고 했습니다.


롬 2:1절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남을 비판하는데, 자기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나쁜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쉽게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는 일에 탁월합니다. 잘못된 것을 찾아서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에 든 티끌은 쉽 게 보면서도,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앞서지 않고, 자아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끝도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이 회개를 위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그 회개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인되게 하시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롬 2장의 끝 부분에서, 바울은 표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표면적 그리스 도인들과 이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란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하나 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주인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나의 머리 대신 에 주님의 머리가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나는 몸의 지체로서 존재하고, 나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내 몸의 지체들이 머리되시는 주님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기기가 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해버리는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름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져 나가야 항복하게 되는 격렬한 씨름이라는 것입니다. 때 로는 실망과 두려움의 폭풍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되심을 믿고 나가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7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10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말씀이 이루어진 인생인 것입니다. “판단의 결국”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판단, 비판, 비방은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다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와 삶의 모든 결국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는 것으로 흘러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스스로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약함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기면, 위로부터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과 연합되면, 모든 것 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의 주인되심을 이루고, 말씀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으십시요. 다른 목적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십시요. 성도란 그래야 합니다. 말하는 것 도 복 받을 말을 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것도 복 받을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정말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새벽 제단에서 엎드 려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도 예배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에 와서 엎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바쁘고 힘겨운 인생을 살면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벽같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성전에 와서 엎드리는 집사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더해주어야 합니다. 힘들어 보이면, 힘을 더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도, 성도들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말씀이 세워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정말 복된 교회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맡기면 위로부터 능력이 임합니다. 맡기면 힘과 능력의 하나님, 지혜와 위로의 하나님, 존귀와 평화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안 되는 일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로서는 힘들었던 일들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주인되심이 이루어져 가고,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가 실재로 이루어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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