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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크기를 알면, 고난도 별거 아니다.(마 8:14-27)


누가 고치시는 분인가?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시라. 고치셨다는 말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나? 고장이 났다는 뜻이다. 인간의 상태는 고장난 상태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고장이 났다. 공중권세 잡은 마귀에 의해서 고장이 났다. 그런데 그렇게 고장난 인간을 고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다. 여러분이나 저나 고장난 상태이다. 그렇게 고장난 우리 인간을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장난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시는 방법이 은혜이다. 17절을 보면, 이사야 53: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이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다. 여기서 “담당하시고”라는 말이 헬라어로 ‘엘라벤’인데, 그 원형이 ‘람바노’라고 했다. 여기서 ‘람바노’는 ‘담당하다,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기억하시나?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라고 했다. 주님이 나의 병들고 아프고 연약한 인격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여러분을 받아주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사


그리고 어떻게 하신다고 했나?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했다.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질병을 그냥 불에 태워버리신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죄와 아픔도 그냥 없애 버리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님이 짊어지셨다고 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복음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를 보고 예수님께로 몰려왔다. 이 때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다. 한 사람이 서기관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례하고 따르겠다는 제자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확인해 주셨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따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은혜받은 자로서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데, 주님께 기쁨이 되면 좋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말씀을 보자.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말했다.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권세에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 예수님이 주님은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여기를 잘 보셔야 한다. 서기관이 어떤 뜻으로, 어떤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답이 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 “인자”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선생님”이면 머물 곳도 있고, 존중받는 인생도 되실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하신다. “나는 선생이 아니다. 나는 인자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선생으로 살면 내 인생은 편하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 인자는 어디에도 머리를 둘 곳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편안한 곳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보다 앞서는 것이 없게 하라


서기관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의 영광을 구하려고 하면 얻을 수 없다. 인생의 편리와 만족을 구하려면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뒤에 나오는 말씀이 장례를 치르려는 제자의 이야기이다. 21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사람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먼저 가서”라고 말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구하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다.

여기서 “죽은 자”라는 말이 헬라어로 ‘네크로스’인데, 쉽게 말해서 ‘시체‘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시체가 시체를 매장할 수 있겠나? 문자적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크로스’(죽은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밖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죽은 상태인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다루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따르라고 했다. 영원한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장례를 치뤄야 하는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다루는 전형적인 관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영혼”의 문제이다. 무엇을 쫓아가는 존재가 될 것이냐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쫓는 자가 되지 말고 생명을 쫓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죽음을 쫓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죄와 사망을 쫓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영원을 쫓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죄와 사망을 쫓는 사람들은 부정적이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산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면 안 된다. 성도는 적극적인 신앙, 긍정적인 마음으로 승리해야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고,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을 즉시로 멈춰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이야기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은혜받은 기쁨을 이야기하고, 신앙의 능력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신앙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은 육신의 안락과 편안함을 얻는 길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오히려 육신의 안전함을 깨운다. 육체의 편안한 길을 추구하지 않는다. 새벽을 깨우면서 기도하는 삶이 육체의 편리가 아니다. 이렇게 바이러스와 질병으로 위협적인 세상에서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안전한 삶이 아니다. 기도하는 삶은 육신으로는 고단한 삶이다. 신앙생활이란 육신으로는 피곤한 인생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던 것이다.

성도는 일생을 은혜로 산다.


그러니까 성도는 “일생을 편하게 살았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일생을 은헤로 살았다”고 고백한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은혜로” 일생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성도이다. 은혜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이 영광의 맛을 아는 사람은 거기에 생명을 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잠깐 잠깐 맛을 보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다. 그림자와 같은 영광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 영광에 대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영광의 크기를 알면, 고난도 별거 아니다”라고 했다. 고난이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영광의 크기를 알면, 고난을 얼마든지 감당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천국에서의 영광을 기대하시면서,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사시기 바란다. 부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적극적인 신앙으로 사시기 바란다. 죽음을 따르고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따르고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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