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을 읽는 자는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노에이토’는 ‘깊이 생각하라,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냥 읽고 지나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라, 깊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읽고 그냥 지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계속 “묵상하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묵시를 보여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확실히 보여주시는 진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때, 확신이 생기고, 확신에 따라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이 중요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시려는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으라고 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묵시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증한 것을 경계하라.
이것을 염두에 두고, 15절을 다시 보십시요.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예언이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때를 기준으로 보면, 그런 일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전 168년에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웁니다. 그리고 레위기 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말씀하신 “돼지”로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이게 성전에 세워진 “가증한 것”입니다. 헬라어로 ‘브델뤼그마’인데, ‘몹시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전 164년 쯤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의 아들 마카비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유다를 독립시키고 성전을 정결하게 회복합니다. 이 때를 기념하는 절기를 “수전절”이라고 합니다. 요 10:20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자로 “수전”이란 말이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 성전을 재건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하누카”라고 하는데, ‘봉헌’이란 뜻입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의미로 “하누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과거에 “멸망의 가증한 것”, 즉 성전을 황폐하게 하는 몹시 혐오스러운 것이 세워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게 심판의 징조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지막 심판의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환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속에서 영적인 혼란도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24절을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큰 표적과 기적들, 경이로운 일들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어떤 표적과 기적들을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가지 표적과 기적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데,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가증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주의 성전이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화의 물결이 문지방을 넘어서 여러분의 영혼에까지 침범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성의 문화, 휴머니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 시대가 “죄”를 ‘문화’라고 포장합니다. 복음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사람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 즉 ‘성전을 황폐하게 하고, 복음을 더럽히는 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적인 무감각에서 깨어나라.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의 가증함을 모릅니다. 가증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가증한 것을 보면서도 ‘심판이 가깝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기고, 좋은 데 시집가고 장가가려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무슨 현상이겠습니까? 가증한 것을 보면서도 가증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인생의 핵심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세속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표적과 기사”를 따라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무엇을 따라가야 합니까? “말씀”입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적”을 따라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미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큰 표적과 기적을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성도는 말씀에 비춰서 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역사해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큰 표적과 기적을 보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여러분 더욱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고, 특정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사람을 보면 분명하게 분별하십시요. 그가 복음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지를 확인하십시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는 진리의 말씀과 가까워지게 하는지, 멀어지게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안목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생존이 아니라, 말씀이 목적되게 하라.
28절을 보십시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검”이란 말이 ‘시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당연하 말씀이지만, 여기에는 영적인 메타포가 있습니다. 이게 어떤 공간적인 자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존재의 죽음”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의 존재를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먹고 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즉,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상태, 말씀이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표적과 기적을 따르면서, 말씀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주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검의 상태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결국, 독수리의 밥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말씀에 따르면, 마지막 심판 때에 “데려감을 얻지 못하고,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마 24:40)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은 버림을 받고, 어떤 사람은 데려감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버림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버림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아의 때와 같이 아무런 준비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홍수가 나서 멸망할 때까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롯의 때처럼, “먹고, 사는 것”에 연연하면서 그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존재의 상태를 “주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검”을 넘어서는 존재의 상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목적이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욕망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들어와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말씀이 이루어진 상태”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씀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한 말씀에 더욱 목말라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런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주검을 넘어선 사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된다고 말씀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암흑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것이 있습니다. 30절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심판과 절망 가운데 통곡하던 사람들이 “인자”(즉,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세상에서 시련과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말씀 안에서,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면서,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분하시는 때가 옵니다. 그러니까 시련과 환난으로 육신이 흔들릴지 몰라도 영혼은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더욱 말씀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에 미혹되지 말고, 말씀에 딱 붙잡힌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요. 여러분, 주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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