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차이에서 열매가 달라진다.


작은 차이에서 열매가 달라진다.(창 25:19-26)


오늘 읽은 창세기 25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진단하시는 내용이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이 두 아이가 어머니 배 속에서 싸우는 것이다. 이삭이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물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이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진단이었다.


모태에서 뛰놀고 있는 두 아이를 하나님이 보시니까 장차 두 나라와 두 민족이 되겠다는 것이다. ㅋ그런데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간단하게 말하면, 에서는 하나님을 떠나 실패자의 길을 걸을 것이고,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성공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뱃속에 있는 아이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셨다는 말인가? 무엇을 보시고 두 아이의 미래가 달라질 것인지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이 보신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1.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달랐다.


에서와 야곱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란, 에서는 자기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야곱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차이이다. 에서의 위치가 장자이다. 이스라엘에서 장자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을 두 배로 상속 받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특권은 아버지의 신앙과 축복을 물려받는 특권이다. 그러니까 에서는 아주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해 버리고, 사냥을 다녀와서 배가 고프다는 이유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다. 자기의 장자권, 자신의 위치를 티끌보다 가볍게 취급해 버렸다.


반면에 야곱은 어떠했나? 생각해 보면, 야곱이 좋지 않은 면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해 사용하신 이유는, 야곱이 가진 핵심적인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가 야곱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위치가 어떤 위치냐면 불리한 위치이다. 그는 장남이 아니다. 그러니까 유산도 적고, 아버지의 하나님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더한 약점은 아버지가 자기보다 형인 에서를 더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자기를 인식하고 나니까,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파고들어가려고 온갖 힘을 쓴다. 자기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나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위치를 바꾸실 수 있는 분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이 그에게 축복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2. 변화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달랐다.


에서는 현실 안주형의 인간이다. 에서가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보면, 온종일 사냥을 하러 들판을 다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주도하고 바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자기의 영혼에 그다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삭 가문에 걸고 있는 섭리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는다. 현실에 주어진 삶에 대해서만 만족하는 스타일이다. 반면에 야곱은 다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롭게 변화되어 간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코드가 그들의 이름이다.


에서를 보면, 에서의 이름은 “털이 많다”는 뜻이다.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붉고 털이 많았다. 그가 태어날 때의 특징이 그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다가 에서가 또 하나의 이름을 얻는데, 그것이 ‘에돔’이다. 에돔이라는 이름의 뜻은 “붉다”는 것이다. 얼굴색이 붉은 것, 붉은 팥죽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것에서 이 이름을 얻었다. 에서와 에돔이라는 이름이 다 타고난 것에서 온다. 운명적 기질로 타고난 틀에서 얻어진 이름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야곱은 다르다. 야곱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다. 첫 번째 이름은 야곱인데,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야곱은 처음부터 이름이 도전적이다. 자기 형의 발 뒤꿈치를 잡았다. 그는 끊임없이 잡으려고 한다. 야곱은 속이는데 선수였다. 그는 자기 형을 팥죽 한 그릇으로 속인 사람이다. 게다가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인 라반까지도 속인 사람이다. 야곱은 가는 곳마다 속이고 다투는 일에 앞서 있다. 가는 데마다 평화를 깨는 사람이 야곱이다. 아버지 집에서 평화를 깨더니 외삼촌 집에 가서도 외삼촌 집의 평화를 깨뜨렸다.


그런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변화되었다. 호 12:4절을 보면,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야곱은 천사와 힘을 겨루었다. 그가 이겼다고 하지만, 힘겨루기에서 지지 않았을 뿐이다. 야곱은 천사에 의해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씨름을 하던 중에 뼈가 부러지고, 힘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해 보라. 절대로 지면 안 되는 싸움인데, 힘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겠나? 엎드려서 다리를 부여잡고 매달리는 방법 외에는 없다. 바로 이것이다. 야곱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울면서 그에게 간구했다.” 여기서 “울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는 크게 통곡하면서 울었다는 뜻이다. 야곱은 인생의 절대적인 위기 앞에서 천사의 다리를 잡고 “통곡하면서” 간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울며 간구하는 야곱을 만나주셨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으로 오랜 세월 해석되어 왔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이긴 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긴 자’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자기의 운명을 이겨냈다. 축복을 침노하고, 운명을 뚫고 나온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또 하나의 이름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이 “여수룬”이다. ‘하나님의 기쁨’ 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나온 다음에 이사야서에서 야곱을 부르는 새로운 호칭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여수룬’이라는 이름은 연단을 거치고 나온 사람, 불의 시련을 거치고 나와서 정금처럼 단련될 대로 단련된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이처럼, 야곱의 이름이 변화되는 과정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주어진 현실에 멈추지 않고, 현실과 맞서면서 새로운 미래, 새로운 인간으로의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3. 인식의 차이에서 행동의 차이가 나타났다.


작은 차이가 결국에는 열매의 다름으로 나타난다. 야곱과 에서가 가졌던 인식의 차이는, 결국 에서와 야곱의 행동을 다르게 하는 패턴으로 드러난다. 그 인식의 차이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삶에서 드러나는 행동과 열매는 엄청난 차이가 되었다.


에서가 하나님의 언약과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니까 그의 행동하는 패턴이 대부분 본능과 감정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팥죽에 장자권을 팔라는 말을 듣고 나서, 에서가 하는 말이 무엇이었나? 31-32절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잠시 잠깐 찾아온 “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 에서는 단 한끼를 굶고 짐승처럼 먹을 양식에 자신의 축복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야곱은 가치와 약속을 지향하는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하는 문제에서도 부모님이 정해주신 약속을 따라서 여자를 찾아 나간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 외삼촌과 한 언약을 지키면서 행동한다. 자신의 본능과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보았고, 약속과 사명을 따랐다. 야곱은 때로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기도 했다. 그의 도덕과 윤리성을 따지고 보면 올바르지 못한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부모의 신앙을 유산처럼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언약의 가치를 지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인생이 야곱을 축복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야곱이라는 좋지 못한 이름에서 시작한 인생이 이스라엘을 거쳐서, ‘여수룬,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이름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아야 한다. 마음으로 언약과 말씀을 따라간다면, 거기에 따라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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