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포도주가 흘러넘치게 하라(요 2:1-11)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것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도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믿음은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부정적인 환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축복의 포도주가 우리 가정에, 우리 삶에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1.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신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결하시는 분이다. 생각해 보라. ‘왜 포도주가 떨어졌을까?’ 사람들이 잔치에 초대받아 온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그런 사실에 동의할 수 있다. 당연히 잔치에 왔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향에서 질문해 보자. ‘그렇다면 왜 포도주만 떨어졌을까?’ 그렇다. 왜 포도주만 떨어졌을까? 초대받은 손님이 많아서 포도주가 떨어질 정도였는데, 다른 음식은 넉넉했을까? 왜 예수님을 포도주 이적만 나타내셨을까?
어떤 분들은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포도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당시 랍비들이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잔치에서 포도주는 필수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데 없어져 버린 것,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 가정이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본문에 등장하는 물과 포도주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은 피와 물에 대해서 특별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출애굽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특별한 사건이 유월절과 홍해 기적이다. 유월절 사건에서는 이스라엘이 양피를 통해서 생명을 구원받는다. 홍해 기적을 통해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니까 출애굽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피의 사건은 생명의 구원을 의미하고, 물의 사건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왜 물과 포도주인가? 그것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물과 포도주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혼례를 치르는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나? 육적인 안목으로 보면 포도주이다. 그런데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구원을 결혼하는 가정에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이 이런 분이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을 초대받은 손님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로 모셔야 한다.
포도주는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계신 곳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기쁨의 근원이 말라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항상 기쁨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나의 혼례 잔치에서 포도주가 말라버린 것처럼, 우리 삶에서도 기쁨의 근원이 소멸될 때가 있다. 예수님을 떠나 살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쁘지 않을 때가 있다. 왜 그런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전혀 기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2절과 4절에서 밝혀낼 수 있다. 예수님은 혼례에 청함을 받은 분이다. 그냥 지나는 길에 결혼식장에 들른 것이 아니라 초청을 받아 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잔치를 치르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것이 예수님과 마리아 모두에게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자신을 초대한 사람이 곤경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은 손님의 자리에 계실 때에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초대를 받은 손님이었지, 그 집의 주인이 아니었다. 잔치집 사람들이 주인이고, 예수님이 손님이다. 여기서는 어떤 역사도 일어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을 손님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도 기대할 수 없다. 이 관계가 뒤집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그 분의 종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는 마리아에 의해 절묘하게 관계가 뒤바뀌어지고 있다. 5절,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관계가 바뀌자마자 예수님이 주인의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하셨다. 자신의 종들에게 말라버렸던 기쁨의 근원을 기적같이 공급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에는 제한이 없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 영생하도록 기쁨의 샘물이 솟아나는 것이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인생에서 기쁨의 근원이었던 것이 말라버렸다면, 이제 예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보시라. 내가 주인인가, 예수님이 주인인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인정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3.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간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요청에 잠깐 거절하셨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지시했다. 그것은 일은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것이 기적과 변화를 체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려는 행위나 말씀이 인간의 상식을 초월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변화를 나타내실지 몰랐지만, 방법 만큼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라고 말한 것이다. 그녀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저것 따지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말씀을 몇 번 읽었다거나 신앙생활을 몇 년 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믿고 따르는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봉사하느냐가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성경말씀을 몇 번 읽었느냐가 능력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고 능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예수님께서 내 삶에도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없다.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분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경험할 수 없다. 오늘 기적은 작은 믿음, 마리아 한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기적을 체험하는 출발이 되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주님께 간구하시라. 그분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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