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는 삶(마 6:9-13)
마 6: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여기서 “다만”에 해당하는 단어가 ‘알라’라는 헬라어인데, ‘그러나’라는 뜻의 접속사이다. 그런데 강조하는 뜻으로 ‘오직’이라고 사용될 때도 있다. 또 하나, ‘알라’는 앞 문장을 강조하는 점층법적인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알라’에 대해서 단순히 ‘오직, 혹은 다만’으로 오해할 때가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 주기도문 전체가 이상해진다. 우리가 ‘알라’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주기도문에서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그것은 앞서 드렸던 기도들을 그냥 넘기시더라도 ‘오직, 다만’ 악에서 만큼은 구해달라’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라’는 앞 문장을 강조해서 이어나가는 표현이다. 앞에 있었던 기도뿐만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것까지도 응답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 6:13절은 “하나님,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악에서도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이다. 그러면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것과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를 연속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구하라는 뜻일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주제로 살펴볼 것이다.
1. 첫째, 악한 상황에서 건져달라는 기도이다.
우선 우리는 악에서 구해달라는 상황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구하시옵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뤼사이’인데, ‘루오마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한다. ‘루오마이’는 ‘흐르는 물에서 끄집어내다. 위협으로부터 구출해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기도는 “악”이라는 상황 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언젠가 우리가 악에 빠지면 그때 가서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악한 상황에 빠져 있으니까 거기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시험에 빠져들었을 때, 우리는 마귀의 권세에 대항해서 싸워 승리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가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마귀의 영역으로 끌려가면 시험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면 악으로도 빠지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면 이미 죄악에 물들어 버린 악한 세상이다.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배후에서 역사하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악한 세상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언제라도 마귀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악한 세상, 혹은 악한 상황, 혹은 악한 자들로부터 우리를 건져 달라는 기도가 오늘의 말씀이다.
이 세상은 진리를 미워한다. 예수님께서는 마 10:22절에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복음을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마귀가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신앙의 싸움, 영적인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이다. 그러니까 악한 세상에 물들어서도 안 되고,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에 빠져도 안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 둘째, 세상이 악하다고 악한 것을 보면 안 된다.
악이라는 말이 ‘포네로스’라는 헬라어인데, 이 단어는 ‘악한, 비난받을 만한, 불행한’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 11:34)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눈이 나쁘다”는 말이 헬라어로 ‘포네로스’라고 했다. 그래서 눈이 나쁘다는 것은 인간이 악하고 해로운 것, 비난받을 만한 것, 불행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어떤 상황에 빠져서 살아가나? 이렇게 악하고 해로운 것을 바라보는 현실에서 살아간다. 비난받을 만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살고,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산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보인다.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을 비난할 만한 것들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꾸 악하고 해로운 것들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것들을 자꾸 바라보면서 산다. 이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을 보는 세상, 부정적인 보게 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성도는 악으로부터 구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악을 보지 않을 수 있나? ‘초점’이다. “눈이 성하다”고 할 때, 쓰인 단어가 ‘하플루스’라고 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무엇과 섞여있지 않다. 무엇과 엮여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불순물들과 엮이고 섞이지 않은 것이 ‘하플루스’이다. 그래서 이 단어를 킹제임스 버전 성경에서는 ‘Single’로 번역했다고 말씀드렸다. 바로 이것이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만 보여 지게 되면, 우리가 다른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악에서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주님만 보여 지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성도란 주님의 은혜와 언약을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고난이나 환난이라도, 외로움이나 절망감이라도, 수치감이나 원망감이라도, 은혜 안에서 ‘장차 다가올 영광의 미래’로 보여 지게 되는 것이다.
3. 셋째, 하나님의 목적을 겨냥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눅 16장에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그는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놓은 재물을 낭비했다고 했다. 그 때 “낭비한다”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스코르피조’인데, ‘의무를 게을리 하다, 자금을 횡령하다’는 뜻이 있다고 했다. 불의한 청지기가 왜 불의한 사람이라고 불려졌나? 그는 한 때 주인의 재산을 횡령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전까지 주인이 맡겨놓은 것을 가지고 자기의 목적에다가 사용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이 사용되어야 하는 곳에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이 맡긴 것을 다른 목적에 사용했다. 주인이 맡겨 놓은 것으로 주인의 목적을 겨냥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과 목적을 겨냥해서 살았던 것이다.
그 말씀은 정확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가 누구냐면 바로 우리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과 시간과 재물을 주셨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생명도 시간도 건강도 재물도 모두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소유주가 되신다면,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쓰여 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의한 청지기처럼 산다. 주인이 맡겨 놓으신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횡령해 버린다. 의무를 게을리 하고, 주인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맡겨 놓으신 생명과 시간, 재물과 직위를 자기 목적과 유익을 위해서 횡령해 버린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뜻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과 행복을 위해서 낭비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행복을 겨냥하고, 자기의 만족을 겨냥하고, 자기의 풍요를 겨냥하는 것이 ‘포네로스’이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나님께 비난받을 만한 상태, 쓸모없는 상태’로 산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대학에 합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해 달라. 좋은 직위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 달라.’ 솔직히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지도 못했지만, 진짜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어느 때에라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 중에라도 환난 중에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따라갈 때, 하나님이 높아지시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겨냥해서 사용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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