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으로 뚫으려 하지 말고, 기도로 넘어서라.(마 15:21-28)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본문은 가나안 여자의 문제가 해결되는 장면입니다. 이 여자에게 딸이 있는데, 귀신들려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에게 소리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절) 여기서 “흉악하게”라는 말이 헬라어 ‘카코스’입니다. 나쁜 열매를 표현할 때, 주인의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표현할 때 ‘카코스’라고 했습니다. 이게 마귀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나 신앙에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마귀가 역사하기 시작하면,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존재하는 목적은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역사하면 영혼구원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마귀는 쓸데없는 일에 관심하게 해서, 시기와 분쟁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가 마귀에게 틈을 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잘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먹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매듭지으면서, 예수님이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을 존중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본질은 놓치고, 형식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라.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 15:19절을 보십시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이런 것들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생각이 나옵니다. 살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했는데, 이런 것이 나옵니다. 간음이 나오고, 음란이 나옵니다. 정욕과 음욕이 마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이 나오고, 거짓 증언이 나오고, 비방이 나옵니다. 이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모세는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신 4:9)고 했습니다. 잠 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도 요즘 이 마음을 지키는게 어렵습니다. 마음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화가 생기고, 비방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보시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유대인들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 이야기 뒤에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막 7장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악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오히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고,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악한 생각, 더러운 마음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 여자처럼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는 교훈입니다. 22절이 시작될 때, 우리말 성경에서 해석되지 않은 표현이 “카이 이두”입니다. ‘카이’는 접속사고, ‘이두’는 “보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그러나), 보라”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책망하신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형편없습니다. “그런데 보라. 그러나 보라”는 것입니다. “저 이방 여자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가막힌 스토리 아닙니까? 이 여자의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믿음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가라.


그러면 여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행동하는 믿읍니다. 이게 이방인 여자가 가졌던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녀의 딸이 귀신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딸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돈도 많이 썼을 것이고, 여기저기 찾아다니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소리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 그런데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자를 안심시켜서 돌려보내자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5:24절,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만하면 물러설 만도 합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따르던 여자가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인 믿음으로 나갑니다.

이때 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개”라는 것이 헬라어 ‘퀴나리오’인데, ‘애완견’이란 뜻입니다. 애완견을 이뻐하고 사랑할 수는 있지만, 자식의 양식까지 취해서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인 여자는 애완견과 같은 처지라는 것입니다. 이게 한편으로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이겠습니까? 이쯤되면 여러분은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몇 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면, 전도하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자가 끝까지 포기를 모릅니다. 믿음을 꺾지 않습니다. 진짜 “불굴의 믿음”입니다. 27절을 보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저는 강아지와 같이 연약하고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은혜라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요.” 이게 믿음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괴롭고, 질병이 깊어도 악한 생각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울더라도 믿음을 붙잡고 울라.


때로는 눈물 밖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것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순간에도 믿음을 붙잡고 울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힘으로 뚫으려 하지 말고, 기도로 넘어서라”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뚫으려고 하면, 마침내는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기도에 의지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에 의지하고, 주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힘과 능력과 위로와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메가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28절을 다시 보십시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호스’는, ‘~만큼’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소원만큼 되리라”는 것입니다. “네가 바라는 만큼 네게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소원하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만큼, 소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일 4:4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사도 요한은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란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