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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쌓이면 우연도 필연이 된다.



기도가 쌓이면 우연도 필연이 된다.(창 24:10-20)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앞세웠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도가 습관화되어 있던 사람일 것이다. 늙은 종이 신부감을 고를 때 기도를 했다는 것은 자기 주인이었던 아브라함을 보고 배운 것이다. 늘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습관이 늙은 종에게 전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을 겨냥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가 습관화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가 쌓이면, 우연도 필연이 된다. 기도가 쌓이면 우연이 중첩되어, 필연적이 사건으로 응답되는 것이다. 성도란 이것을 진리로 믿으면서 날마다 깊은 기도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하는 삶이 능력있는 기도의 삶이 되겠나?


1. 언약을 선포하고 구하는 기도에 능력이 임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보면, 그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서 이삭의 신부를 구해야 하는데,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는 안 된다. 그러니까 12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렇게 시작한 기도가 14절에 이르러서는 중요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언약의 후손으로 정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약의 후손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의 배우자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다고 믿었다.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지금 그의 기도에서 중요한 고백이 나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언약이다. 지금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내시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았고, 은혜를 구했다. 그의 현실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언약을 선포하고 구하니까 어떻게 되었나? 15절,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약속대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인지,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란다. 아무리 모질고 거친 현실 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약속을 붙잡고 담대하게 선포하시기 바란다.


2. 주어가 바뀐 기도에 능력이 임한다.


늙은 종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우물로 나왔다. 그 때 늙은 종이 리브가에게 달려가서 물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리브가가 물을 마시도록 하는데, 늙은 종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떠다가 마시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늙은 종이 기도한 대로 리브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리브가의 인격과 성품이 대단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인격과 성품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늙은 종이,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기도가 가능했고, 또 그런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었나? 주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12절을 다시 보자.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 기도에서 주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주어이다. 늙은 종은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나에게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해 주시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어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것이 능력이다.


내 인생의 주어가 바뀌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이끌고 다닌다. 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을 이룬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안 된다, 못 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이 주어가 되면 달라진다. “주님도 이것을 하실 수 없는가? 주님도 이것을 못하시는가?” 그렇게 물으면, 불가능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어가 바뀌면 된다.


기도도 주어가 바뀌면 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 싶습니다. 우리교회가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주어를 바꾸어 보시라. “하나님,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나를 그 일에 도구로 사용해 주세요. 나를 써 주세요.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하나님 나라 위해서 사용해 주세요.” 여러분, 이렇게 주어가 바뀌면 달라진다. 반드시 달라진다. 주어가 바뀌면 여러분이 상상하고 원하는 ‘여러분의 나라’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에 능력이 임한다.


내가 원하는 성공이든지 내가 원하지 않는 실패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볼 필요가 있다. 21절을 보면 늙은 종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21절,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묵묵히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은혜란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흘러넘치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이 결국은 무엇인가? 가장 적극적인 기도의 모습이 무엇인가? 자기를 완전히 죽이는 것이다.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다고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포기할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나는 죽어지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겨야 한다.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주인이 되어야 한다.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내 머리로 무언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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