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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영적인 베이스캠프를 치라


높은 곳에 영적인 베이스캠프를 치라(창 19:12-22)


창세기 19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세 부류의 인간상을 만나게 된다. 첫째가 롯의 사위들과 같은 사람들이고, 둘째가 롯과 그의 가족들이고, 셋째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다.


1. 첫째가 롯의 사위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14절,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의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은 롯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니까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농담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7장을 다루었던 적이 있다. 거기에 귀신들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었다. “왜 저희는 쫓아내 못했습니까?” 그 때 예수님이 했던 대답이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 17:20)이다. 이 대답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주석했다. “너희가 아직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불신앙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믿음이 작은 이유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믿음이 아주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불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진지하게 대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과 진지한 대면을 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떨쳐 버려야 한다. 성도란 언제나 믿음으로 하나님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한다. 하나님과 진지하게 대면하면, 그것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능력을 체험하게 되어 있다.


2. 두 번째가 롯과 그의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씀을 듣고도 지체한다는 것이다. 16절,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저 세상에 사로잡혀 버리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말씀을 듣고도 머뭇거리고 지체한다. 자기 발로 심판의 자리를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롯의 아내같은 경우에는 더 노골적이다. 창 19:26절로 가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여기에서 “돌아보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바트’인데, 그 뜻이 ‘골똘히 생각하다. 마음속에 간직하다’라는 뜻이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하는 일, 집을 구하고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마음에 집착했다는 말이다. 소돔 땅에서 누리던 풍요와 권세에 여전히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는 뜻이다. 롯의 부인은 도망치는 중에 소돔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이것이 망하는 세대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한 결국이 창세기 19장 말씀이다.


그런 신앙하는 태도는 결국 셋 중에 하나가 되고 만다. 롯의 사위들처럼 심판을 가볍게 여기다가 세상과 함께 심판을 당하든지, 롯의 부인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리든지, 롯과 두 딸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정도로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3. 마지막이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들이다. 29절,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중에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셨을까? 그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니까 하나님과 할례의 언약을 맺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짝 엎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가 죽어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할례의 언약을 맺으라고 하신다. 할례란 하나님 앞에서 ‘죽어지는 것(죽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죽어지도록 하시는데, 그렇게 굴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성도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 크신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자기를 다 죽여야 한다.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인생이 자기의 힘과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이 이런 것이다.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포기하는 것,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자아를 죽이고 굴복시켜서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아야 한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신뢰의 문제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열매를 얻게 된다.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병든 자가 일어서게 된다. 죽은 자도 살아나게 된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고, 고난이 면류관으로 바뀌게 된다. 깨어진 관계, 불편한 사람들 때문에 고단하신가?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고민이 있으신가? 자녀들 때문에, 갑자기 처들어온 질병 때문에, 늘어난 빚 때문에 힘든 분이 계신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살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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