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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9_두 번째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출 20:3-7)




두 번째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말씀”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다. 어떤 형상을 보고 엎드려 절하는 것은 형식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 마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따를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1.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출발이 된다.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두 번째 말씀, 곧 우상숭배를 금지하신 이유를 5-6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5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질투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칸나’인데, ‘열렬히 시기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질투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칸나’의 원형이 ‘카나’인데,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열정, 정열’을 나타내는 ‘열심히’라는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질투’라는 뜻을 가진다. ‘카나’라는 단어가 열정과 정열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구절이 왕상 19장에 나온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호렙 산으로 갔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물으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0) 그때 엘리야가 대답한 것이 왕상 19:10절 말씀이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히브리어로 ‘칸노 킨네티 라도나이’라는 말이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여호와를 위한 열정과 정열이 특별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이라는 말씀과 만날 때,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열심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 열심이란 어떤 열심이겠나?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열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열심을 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분인데,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힘쓰신다. 그것을 사 9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사 9:6-7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다. 한 아기(예수님)를 보내셔서 그를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 되기까지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열심을 내시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신 7: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과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무엇으로부터 출발하셨나? “사랑”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의 승리를 약속한다.


5절 후반부에서 6절까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미워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네아’는 단순히 미운 감정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다. ‘사네아’는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매우 싫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 숭배의 결국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증오하고 혐오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혐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잘못된 행동으로 나가게 된다. 그것을 “죄”라고 했다. 그렇게 살면 3-4대가 죄의 갚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죄가 유전된다는 뜻이거나 저주가 유전된다는 뜻이 아니다. 3-4대까지 죄의 갚을 치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고대 사회는 거의 대부분이 대가족 사회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자식들로 3대를 이루어서 살았다. 기본이 그렇다는 것이고, 대개는 증조부까지 해서 4대가 함께 살았다. 그러니까 3-4대가 죄의 갚을 치른다는 것은 한 세대를 이루는 가정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면, 한 가정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말씀이 없이 살아가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다.


반면에 말씀이 다스리도록 하면 크고 작은 문제가 해결되어져 나간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서 “지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샤마르’이다.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지킨다는 뜻이다. 사랑하니까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마음으로 기뻐하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끊이지 않는 은혜가 베풀어지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면, 우리는 언제든지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 두려움이나 염려, 슬픔이나 낙심같은 것들을 물리칠 수 있다. 성도는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곤고도, 박해와 위협도 자기를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롬 8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위대한 고백에 도달했다. 롬 8: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무엇인가?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롬 8:35)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니코멘’은 ‘승리 이상의 승리자(정복자)가 된다’는 뜻이며, 이것은 나아가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자(정복자)가 된다’는 뜻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 안에서 그런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 완벽한 승리’를 뜻하는 표현이다.


3.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에게 영원한 소망을 준다.


시 91편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면, 그것은 모세가 쓴 시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 나왔는데, 어디로 나왔던가? 광야이다.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는 사막이다. 길은 험난하고, 하늘에는 해가 뜨겁게 내리쬐고, 마른 먼지가 숨을 막히게 하는 사막이다. 숨을 쉴 때마다 온갖 질병과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약도 없고 병원도 없다. 병에 걸리게 되면 바로 사망이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다른 민족들이 올무를 놓고, 사냥꾼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헤치려고 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이 없다. 연약한 백성들이다. 그래도 위험한 광야 길을 가야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현실이었다. 이쯤 되면 무섭고 두렵지 않았겠나? 긴장이 되고, 떨리고,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승냥이 떼에 둘러싸여서 풀을 뜯어 먹는 어린 사슴 같았다. 그런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들려준 말씀이 시 91편이다.


시 91편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들의 피난처가 되시며, 요새가 되시며, 의뢰하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약속을 선포했다.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시 91:3-4) 인생의 공포와 두려움에 깊이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 아실 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말씀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 91:14절 말씀이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사랑의 전제 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그 약속의 말씀이 시 91:14절 이하에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다 행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말씀들이 영어 성경으로는 “I will~”로 나간다. “I will rescue him. I will protect him. I will answer him. I will be with him in trouble. I will deliver him. I will honor him. I will satisfy him. I will show him my salvation.”(내가 그를 건지리라.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환난 당할 때에 그와 함께 하리라.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그를 만족하게 하리라. 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런 약속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다. 여러분이 이런 약속의 말씀을 믿고,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여지고 들려지고 믿어져야 한다. 그러면 달라진다. 약속이 믿어지면 두려움이 떠나가게 되어 있다. 바울은 롬 8:39절에서도 분명히 말했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이 위대한 사랑 안에서 사시는 분인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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