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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15_예배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4:21-24)



오늘 말씀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수가성에 살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던 중에 나온 말씀이다. 사마리아 여인, 매일 매일 우물에 나와서 물을 길어야 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낮 12시에 우물로 나온다. 낮 12시면 해가 뜨거워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시에는 12시부터 3시까지 낮잠을 자든지 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낮 12시에 우물로 나왔던 것이다. 왜 그랬나?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 이것이 여인의 현존을 보여주는 코드이다.


그녀는 결단코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 만족이 되지 않고 고통받는 영혼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구원을 얻었다. 도대체 무엇이 여인의 삶을 뒤흔들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은 예배를 주제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시기 바란다.


1. 예배란 영혼에 만족을 채우는 열쇠가 된다.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꾼다. 그런데 그것이 예배 이야기이다. 왜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예배 이야기로 바꾼 것일까? 여자가 가진 영혼의 목마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남편들을 찾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질문은 “나는 예배드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깊은 아픔을 고백한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고 하셨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에서든지 예배할 수 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영과 진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헬라어로는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로 쓰여져 있다. 이 말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혹은 “영과 진리로”라는 뜻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면, 어디서든지 예배할 때가 도래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여인에게는 복음이었다. 자신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로 받아들여졌다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녀의 영혼에 있던 갈급함과 허무함을 단번에 극복하게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진지한 묵상을 해야 한다. “왜 예배가 영혼의 만족이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예배가 영혼에 만족을 채우는 것일까? 우리가 창조주를 섬기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전 3: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겸비하게 엎드릴 때, 알 수 없는 신령한 은혜가 신비롭게도 우리 영혼에 쏟아져 내리게 되어 있다.


“우리는 피조물이다”라는 사실이 진리이다. 이 진리를 망각한 채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피조물이 얻을 만족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 그의 영혼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2.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한다.


요 4: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하셨다. 예배자는 무지한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고 했다. 예배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예배자를 찾으셨다는 뜻이다.


진짜 예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구약성경에서 ‘예배’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어근은 “엎드리다, 절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예배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의 정의는 이것이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행위이며,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모세는 땅에 엎드려 경배한다. 여호수아가 계시를 받았을 때, 그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이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 인도자가 찬양을 인도할 때, 그는 회중을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 회중을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해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제가 설교할 때, 모든 분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 설교는 나쁜 설교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부름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 부름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거나 순종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부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께 엎드린다는 것은 주님에게 굴복한다는 뜻이다.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다. 그렇게 성도가 주님께 굴복하고, 주님께 자기를 맡기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3. 성령과 진리 외에는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말씀하셨다.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성령충만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다. 외형적이며 세상적인 것들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 생각으로 예배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지배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힘들고 짜증나고 피곤할 때도 그만큼 만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아야 한다. 주님은 인간의 이런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영으로 예배하라”고 하신 것이다. 상처가 있고,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예배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배자는 또 한 편으로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진리의 반대를 ‘생각 없음’이라고 했다. 이는 기계적인 예배를 뜻한다. 관습이나 습관이나 의무감에서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죽은 예배”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기념일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기념일은 말 그대로 기념일일 뿐이지, 거기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는 없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의 지배를 받는다면, 행사 자체가 예배보다 중요하다면, 그것은 전혀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두는 행위는 예배를 중지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배는 기계적이거나 생각없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 경험 안에서, 영원한 진리가 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구원의 모든 것이 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님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자에게 “구원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성도이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 외에는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분명히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한결같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여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모여서 염려를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 성도란 모여서 주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할 때 회복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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