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씨앗으로 삼고 실망은 거름으로 쓰라(요 21:1-14)



여러분은 은혜와 실망 사이에서 흔들렸던 적이 있는가? 사람들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 방법이 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라는 인물이 포커스이다. 부활의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셨는데, 처음이 아니었다. 요 21:1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도마, 나다나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두 명의 제자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모여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었을까? 부활하신 주님을 주제로 이야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마 28장을 보면, 천사의 메시지가 나오는데, 갈릴리로 가서 부활의 주님을 보라는 메시지였다. 그들은 천사의 메시지대로 갈리리로 왔다. 거기서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실패를 경험한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친 전력이 있었다. 실망과 낙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뒤에 다시 모였다. 이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 것 같으신가? 비전과 소망으로 충만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실망감과 두려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까?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이 확신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 이제 이 말씀에 담겨진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다.

1. 주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삼으면 열매를 얻는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 죄책감이 있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사실이고,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비전과 소망을 상실했고, 인생의 초점을 잃어버렸다. 확신에 대한 흔들림, 비전에 대한 의심,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의 흐름이 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실망한 마음, 상처입은 마음, 낙심과 같은 마음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대화가 의도했던 대로 풀리지 않고 오해가 일어날 때가 있다. “역지사지”라고 ‘다른 사람과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다. 요 21: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왜 성경은 제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행위에 집중하고 있을까? 왜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역동적인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가? 그들이 대화의 중심을 잡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천사가 지시한대로 갈릴리에 왔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은 미성숙한 상태이다. 여전히 상한 심령이고, 여전히 갈대와 같은 시몬이고, 여전히 비전과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제자들이었다.

풀리지 않는 대화, 답답한 심정을 해소하려고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기들의 상한 심령을 다스려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전과 같은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려는 것이 목적이고, 주님에 대해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배에 올랐지만 고기를 잡지 못한 것이다. 인생의 초점이 분명하지 못하니까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3절 후반부를 보면,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5절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이야기하시는 것일까? 목적이다. “얘들아 배에 타고 있으니 물고기를 잡았느냐? 너희들이 지금 목적을 이루었느냐?” 그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다. 그때 주님이 초점을 잡아 주신다. 6절,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목적을 다시 잡게 하셨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방향을 지시해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으로 순종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열매를 얻었다. 이것이 신앙이다. 인생의 목적이란 결국 주님이 지시하신 방향을 따르는 것이다. 이미 말씀으로 주신 것을 좇으면 그게 열매가 된다. 성공을 좇지 말고 말씀을 좇으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복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면 열매를 얻게 된다.

2. 은혜를 살려서 씨앗으로 삼으면 열매가 된다.

누구나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실망감이나 수치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감정에 지배를 당하면 성공적인 신앙인이 되지 못한다. 제자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4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여러분도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있으면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다. 말씀에서 은혜가 발견되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다. 제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기적을 체험했다. 밤새도록 잡지 못한 그물에 엄청난 고기가 잡혔다. 그것은 진짜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배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초점이 딱 고기에 잡혔을 것이다. 흩어져 있던 초점이 하나로 모였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초점이 잡히니까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엄청나게 잡혀 들어오는데, ‘이게 뭐지?’ 하던 요한의 시선에 예수님이 들어왔다. 7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베드로의 시선에도 예수님이 들어왔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7절) 주님이 보여지고, “주님이시다”는 말씀이 들려졌다.

그런데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신 것이 누구인가? 그렇다.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보이게도 하시고 들리게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동안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괴로워했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베드로를 보시라. 그냥 주님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이런 것이 은혜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시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하신다.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런 은혜를 인생의 씨앗으로 삼아야 한다. 실망감이 들어오면 죽여서 거름으로 쓰라.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기 안에서 모두 죽여서 거름으로 쓰라. 그런 것을 씨앗으로 삼으면 부정적인 인생이 되고 실패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거름으로 쓰라. 오직 은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씨앗으로 삼아서 복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3.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만큼 열매를 얻게 된다.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시고 그 필요에 따랐다. 주님은 그들을 혼내지도 않으셨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으셨다. 밤새 물고기를 잡고 피곤에 지쳐있을 제자들에게 주님은 단 한 마디 말씀만 하셨다. 1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주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힘들었지? 실망이 많았지? 두렵고 떨리기도 했지? 이제 와서 조반을 먹어라. 먹고 힘을 내라. 먹고 일어나라. 먹고 네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밀어내라. 은혜를 생각해라. 이제 나와 함께 먹고 은혜의 길을 가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여기서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는 ‘아가파스’였다. 아가페는 생명까지 주는 사랑이다. 그러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위해 생명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느냐?’로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은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할 때, 헬라어 ‘필로세’로 표현했다. ‘필레오’는 친구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주님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도 아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흔들리는 존재인 것을 아십니다. 제 그릇이 주님께 생명을 바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을 친구로 대할 정도의 믿음이 저의 연약한 본성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물었다. 16절,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여기서 요한은 주님의 물음에 헬라어 ‘아가파스’를 사용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로 물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필로세’로 대답했다.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 저는 생명을 바치기에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제 사랑의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베드로는 자기 한계를 알고 있었다. 과거에 예수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고백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세 번째로 물으시는데, 이 때 예수님의 언어가 바뀐다. 17절,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째로 물으셨을 때, 요한은 헬라어 ‘필레이스 메’로 표현했다. 이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아가페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내려오셨다.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시고 인간으로 세상으로 오셨던 것처럼, 자기의 마음을 비우시고 베드로의 마음으로 내려오셨다.

그러자 베드로고 대답한다. 17절,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고 그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눈높이를 맞추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명 바칠 자신이 없던 베드로가 ‘생명을 바쳐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주님의 사랑에 자기를 완전히 맡겼기 때문이다. 구원의 주님이 인생의 해답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 자기를 완전히 맡기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삶의 열매가 된다. 사람들이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는 언제나 주님은 산성이 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는 당면한 문제보다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주님은 지친 땅에서는 반석이 되시고, 심신이 쇠약할 때는 안식처가 되신다. 목마를 때에는 생수가 되시고, 굶주린 땅에서 양식이 되어 주신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인생을 맡기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 때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