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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졌다가 일어났을 때, 더 큰 박수를 받는다.(출 15:1-5)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인생에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쉽고 편한 인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고단하고 피곤한 여정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요. 때로는 운동장을 잘 달려서 완주한 선수보다,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다시 달리는 선수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넘어졌다가 일어났을 때, 더 큰 박수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선수가, 이게 여러분의 자녀라고 가정했을 때, 1등으로 잘 달려서 들어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져서 순위에 들 가성이 없습니다. 그때 포기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까? 그래도 다시 일어나서 달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선수에게 더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고난과 시련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도란 다시 일어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썩은 나무 뿌리나 죽은 풀 뿌리를 붙잡고 일어나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다시 넘어지게 됩니다. 단단한 생명의 뿌리를 붙잡아야 제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단단한 뿌리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임재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갈렙이라는 인물이 45년 동안 약속을 붙잡고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의식 속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 임재 의식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장벽이나 시련, 고난이나 환난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라는 장벽을 만났을 때, 그것은 오히려 기적을 체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시련을 만났지만 시련으로 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군대를 보았을 때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지만, 하나님을 붙잡았을 때는 기도가 되고, 능력이 되고,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체험하고 나서 모세가 찬양을 부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출 15:1절부터 21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찬양을 “모세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기쁨을 아주 충만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광야를 살자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유가 뒤에 나옵니다.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키 가오 까아’인데, 본래는 ‘높이 일어나셨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바다가 갈라질 때를 보니까 파도가 높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파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호하시고, 애굽의 군대는 덮으셨습니다. 그게 찬송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2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나”라는 표현입니다. 이 한 구절에 “나”라는 표현이 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고, 나의 노래이고, 나의 구원이요,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찬송하고,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도 ‘나’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도 ‘나’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의 고백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고백으로 되는 것입니다. 구원도 내가 고백해야 하는 것이고, 믿음도 내가 고백해야 하는 것이고, 순종도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주권을 맡기면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을 밝힌 이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용사”시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이쉬 밀르하마’는 ‘전쟁의 남자’(전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전쟁을 수행하는 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싸움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싸우면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잘못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모세가 계속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야라’는 화살을 쏘거나 창을 던지듯이, 목표를 향해서 강력한 힘으로 던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애굽 군대와 비교해서 훨씬 탁월하고 위대하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안목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이 벌벌 떨만한 군대였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 바로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셨습니까? 7절을 보면,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가 주님을 거슬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해서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바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대항해서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심판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교만과 탐욕은 9절에서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9절입니다.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바로는 하나님을 대항해서 높아진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바로는 이스라엘의 소유물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일어섭니다. 자기가 망하게 되는 것도 알지 못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항한 것입니다.

“욕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쉬’의 원형이 ‘네페쉬’인데, 이는 ‘영혼, 생명, 욕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사람들은 ‘네페쉬’(즉,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갈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편 42편에 나오는 고백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시 42:1)한 것입니다. 이런 ‘네페쉬’(즉, 하나님 백성의 영혼)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구합니다. 이게 성도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악한 사람의 영혼(즉, 네페쉬)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영혼이 이미 ‘욕망’ 자체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추구합니다. 바로의 군대와 병거가 그랬습니다. 자기들의 욕망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계획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람을 일으키셔서, 거세 파도로 애굽의 군대를 덮으셨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요.


영혼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집니다. ‘네페쉬’가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사모하면, 영혼에 기쁨이 넘칠만한 구원이 일어납니다. 넘어지고 쓰러진다고 해도,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대적인 마귀 사탄은 자기의 권세를 막 높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가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네페쉬’가 탐욕을 추구하게 합니다. 욕망을 따라가게 합니다. 마귀는 그 탐욕과 욕망을 이루어주면서 신자를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걸 따라가면, ‘네페쉬’가 욕망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자기가 이룬 모든 것이 바람처럼 허무로 끝나고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가 되면 달라집니다. 10절을 보면, “거센 물”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거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앗디림’은 아주 복잡한 단어입니다. ‘앗디림’은 ‘위대한, 존귀한’이라는 뜻도 있고, 명사로 사용될 때는 ‘용사, 통치자, 존귀한 자’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군대를 덮은 거센 물이, 이스라엘에게는 ‘존귀한 통치자, 위대한 용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네페쉬’(영혼)이 무엇을 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집니다. 율법적 자아, 탐욕과 욕망이 담겨지면, 거센 물이 심판의 물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추구하면, 거센 물이 여러분의 보호자가 되고, 위대한 인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평화를 얻게 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요. “넘어졌다가 일어났을 때, 더 큰 박수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만, 자기 힘으로 일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 보십시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임재 의식을 가지십시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확실하게 믿으십시요. 그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역사해 주십니다. 이게 우리 신자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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