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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진흙밭에 있어도 마음은 꽃밭에서 살라(마 5:3-12)



논어에 “君子는 求諸己요, 小人은 求諸人이다.”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모든 것을 남에게서 찾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군자는 자기 탓을 하고, 소인은 남 탓을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2)고 하셨다. 자기 안에 있는 부정적인 들보가 사라져야 밝게 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어디를 가든지 화목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나면 분위기가 따뜻해지고 화목해진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화목을 깨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하셨다. 여기서 “화평하게 하는 자”를 KJV이나 NIV와 같은 영어 성경에서는 “the peacemakers”라고 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화목을 위해서 애쓰는 ‘피스메이커’가 있고, 화목을 깨뜨리고 불화를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 화목을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이것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는지,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는지, 그렇게 되었을 때 누리게 되는 복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를 말씀드리겠다.

1. 왜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필요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 당연하게도, 세상이 화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화평을 이루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6:9)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 이안 머레이에게 “하나님의 숨은 보석이며, 20세기의 위대한 성경학자”라고 평가받은 사람이 있는데, “아더 핑크”라는 목사님이다. 아더 핑크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죄가 낳고 있는 무서운 싸움과 증오를 주시한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냐하면 싸움이 없는 곳에는 화평케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싸움이 없는 곳에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없다. 천국에 가면 더이상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없다. 천국에는 싸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나? 세상이 화평을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평화롭지 못하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한결같은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잠깐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가지 않는다. “깨지고, 세워지고, 깨지고, 세워지고”를 반복한다. 부부 간에 평화를 누리다가 어느 순간에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날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평화를 누리다가 그것이 깨지고 불화가 일어날 수 있다. 형제 간에도 마찬가지고, 직장과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평화가 완성되었다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언제 어느 순간에 평화가 부서져 나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세상은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가 사는 거의 모든 곳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고, 미움과 시기가 일어나는 것일까? 로이드 존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 하나, 곧 죄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 중심성”이라고 했다. 결국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문제이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약 4: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성경은 모든 싸움, 모든 다툼, 모든 전쟁이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헬라어 ‘헤도돈’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에서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정욕”이다. 이런 정욕이 자기를 주장하게 되면, 화평이 아니라 다툼과 싸움으로 가게 된다. 분쟁이 일어나고, 갈등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약 4:1절은 “저희 지체 중에서”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교회에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는 더욱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한다. 바울은 골 3: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을 다스리시게 하기 바란다. 그래서 “화평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2. 어떻게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로이드 존스는 “성경에 의하면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새 마음, 새 사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했다. 왜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왜 교단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왜 세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는가? 인간의 마음이 “정욕”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아의 만족을 위한 탐욕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인도 하고, 간음도 하고, 시기와 질투도 하고, 더러운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정욕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화평을 이루려면”, 우선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 자신이 먼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새 마음,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일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화목을 이루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버린 악인에게는 결코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투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는 아내를 원망하는 자가 되었다. 창 3:12절,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가인의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 그는 동생을 살해하는 자가 되었다. 다윗의 시선에서 하나님이 멀어졌을 때,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는 자가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죄가 화목을 깨뜨린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면 인간은 계속해서 전쟁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누가 화목하게 할 수 있는가? 누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나? 그렇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 롬 5: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다.

누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셨는지, 누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는지, 누가 여러분을 화목하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평화의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기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 자기의 자아를 전적으로 잊어버려야 한다. 자기를 붙잡으면 실패하게 된다. 자기를 믿고 의지하면 불화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다툼과 시기를 이겨내지 못한다. 평화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붙잡으시기 바란다.

3. 화평을 이루면 어떤 복을 받는다고 했는가?

마 5:9절을 다시 보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이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원한다.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없는 이유는 죄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않으면 가정이 화목할 수 없고, 교회가 화목할 수 없고, 세상이 화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한다. 교회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한다.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한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자기의 자아를 버리게 하고, 주 예수 그리스를 붙잡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음 전도로 나갈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불화하고 있다면, 그에게 복음을 전하시라. 가정에서 불화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워지게 하시라. 불화가 있고,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시게 하라. 그러면 죄가 사라지고, 자아가 부인되고,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다.

골 3: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께 주장하게 해야 한다. 헬라어 ‘브라뷰에토’는 ‘명령하게 하라, 다스리게 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명령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다스림에 순종하겠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실 때 가능하다. 여러분이 주님과 연합을 이루고, 주님께 여러분을 온전히 맡겨야 가능하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에게 명령할 때, 그것을 순종해야 한다.

불화가 들어왔다. 그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명령하시는대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마귀가 “분쟁을 일으켜라. 정죄하라. 갈등과 다툼을 일으켜라”고 명령하는대로 따르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평강”에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다툼, 갈등, 미움이 여러분에게 들어왔다. 그때 마귀에게 이끌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게 하라는 말씀이다. 여러분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평안하라”고 말씀하신 명령에 순종해서 “평안하라”는 것이다.

요 14: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셨다. 이 말은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다는 뜻이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평안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하고 편안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평안이다. 진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진짜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이다. 무엇이 있든지 없든지,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오는 평화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또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권능을 얻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까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화목을 이루는 자로 살고, 화목을 누리는 자로 살게 되시기 바란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권세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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