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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지켜라(욥 42:10-17)



종교개혁자 칼빈은 욥의 믿음에 매료되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의 설교 700편 가운데 159편을 욥기에 대한 말씀으로 설교했다. 욥기의 결론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약 5:11절을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했다. 우리는 욥의 인내를 들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넘치는 방법으로 욥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는 지독한 시험을 당했고, 잠깐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다.

하나님이 가장 관심하시는 것은 언제나 여러분의 “믿음”이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믿음이 굳건할 때 하나께서 기뻐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믿음이 뿌리이다. 뿌리를 지켜야 한다. 이 뿌리를 잘 지키면 결국에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1. 주인이 바뀌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어야 한다.

욥은 사람들과 논쟁하고, 하나님께도 “왜 이러십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무슨 말씀이었나?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네가 있어냐? 네가 봤냐?”는 말씀이다. 이런 말씀이 41장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하나님의 긴 말씀이 끝나고 난 뒤에, 욥이 그냥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는 고백만 하고 작아진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의 의로움을 회개한다. 욥 42:6절,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자기 의가 부러진 것이다. 자기를 의지하고 주장했는데, 이제는 자기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개하나이다.”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주인삼겠다는 고백이다. 욥의 회개는 의미가 있었다. 욥기의 결론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정죄하신다. 욥에게 자기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도록 부탁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욥의 억울함을 풀어주신 것이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10절을 보라.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라. 하나님이 욥의 손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아직까지 욥의 상태가 온전하게 회복된 것이 아니다. 욥의 재산이 회복된 것도 아니고, 그의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욥의 곤경”이 회복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욥이 회개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회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과정이다. 회개를 통해서 주인의 자리가 바뀐다. 이전에는 자기의 자아가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 주인이 바뀐다.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주인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진실로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욥이 자기를 괴롭혔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마음에, 하나님은 여지없이 은혜와 복을 내리신다.

2. 하나님께서 회복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가다가도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 욥기의 이야기를 잘 묵상해 보시라. 하나님을 신앙하면 고난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지독한 고난을 당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그들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출애굽 세대들과 똑같이 38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다.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서 13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성경은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고난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실패를 통과하고, 역경과 시련을 만난다. 배신을 당할 때가 있고, 수치와 모욕을 당할 때가 있다. 실망하기도 하고, 낙심할 만한 일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런 것을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은 결국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 다만, 고난이나 시련이나 역경의 과정을 통과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어야 한다. 성도는 믿음을 포기하면 안 된다.

욥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자.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에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다고 했다. 욥은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재물도 이전보다 많이 가지게 되었다. 자녀도 낳았는데, 아들 일곱과 딸 셋이었다. 딸이 얼마나 예뻤는지 딸들에게도 재물을 나눠 주었다. 15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이처럼 모든 것이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욥에게는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그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상처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가슴에 묻은 아픈 기억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고 자식이 돌아가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자녀들에 대한 아픈 상처는 그가 부유할수록 더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져주셨다.

16절을 보면, 욥이 140년을 살면서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욥의 상한 심령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손자와 손녀를 보게 하셨다. 아들과 딸에 손자와 손녀를 보면서 욥의 옛 상처가 조금씩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런데 완벽하지는 않다. 다시 욥이 옛날 일을 기억할 즈음에, 하나님은 또 손자와 손녀를 보게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욥의 마음을 만지시기 위해 무려 4대에 걸쳐서 손자들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인격적으로 회복하시는 분이다.

3. 비전과 사명으로 흘러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욥기의 마지막 대목에는 아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딸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 대목이 아주 독특하다. 성경에는 자녀들의 이름을 남길 때, 주로 아들의 이름을 적는다. 그런데 여기는 딸들의 이름만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자는 생명을 잉태한다.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쓰임받는 것이 여자이다.

그렇다면 욥기의 대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있다. 욥의 가문에 새로운 가풍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욥은 딸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이전과 차원이 다른 새로운 미래를 소망했다. 과연 그가 소망했던 가정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딸들의 이름을 해석하다보면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첫째가 “여미마”인데 순결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라는 뜻이다. 욥은 가정이 하나님 신앙으로 순결하기를 바랬고, 하나님의 은혜로 샬롬의 평화가 지속되기를 소망했다. 둘째가 “긋시아”인데 ‘계피 향기가 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계피는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욥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의 아내는 남편과 하나님을 욕하고 떠났다. 그때 냉정함을 느꼈을까? 욥은 이제 새로운 자기의 가정에 따뜻한 말과 사랑이 넘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나서는 “게렌합북”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사명이다. 셋째가 “게렌합북”인데 ‘아름다운 눈, 보배로운 눈’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기의 가정에 아름다운 시선이 유지되기를 소망했다. 진실한 것을 보는 눈이 되기를 바랐다. 좋은 것을 바라보는 눈,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비밀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은혜가 사명으로 이어지는 가정이 되기를 소원했다.

욥의 가정은 이미 그것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5절에서 이미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7절에서,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고 했다. 여기서 ‘사베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베아’, 이 단어는 단순하게 오래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이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는 ‘꽉 차게 살았다, 만족하게 살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욥의 생애가 만족한 삶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인생이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인생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족하고 완전한 삶이었다는 뜻이다. 그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러분,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된 삶이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복된 가정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복된 교회인 것이다. 욥의 가정에 세워진 것처럼, 여러분도 믿음의 반석위에 세워지시기 바란다. 믿음의 반석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우리 교회에 사랑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따뜻한 정감이 넘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 보배로운 것을 보는 눈’으로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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