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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세대는 문제의 핵심 처리법이 다르다.(수 3:7-14)



승리하는 세대의 문제의 핵심 처리법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세대가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요단을 건너는 길 말고 다른 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요단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홍해 를 건너게 하신 것처럼,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도 물을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강을 건너게 하시는 방 법이나 시기도 특별합니다. 우선 시기적으로 보면, 요단강이 범람할 때라고 했습니다. 요단을 건너는 방법은, 언약궤를 어깨에 맨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흐르는 강이 멈추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먼저 범람하는 강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흐르던 요단강이 멈추고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 마른 요단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가게 하십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올리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되었 습니다. 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된 뒤에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 이 먼저 들어가야 했습니다. 먼저 요단에 들어섰을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려는 계시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출애굽 세대는 엄청난 기적과 능력을 체험했는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출애굽 세대가 가졌던 본질적인 문제는 “불신”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메마른 광야에서 물이 쏟아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매일같이 만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믿음이 없었습니다. 어떤 문제들과 만 날 때마다 항상 “자기들 생각”을 주장하고 앞세웁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기 생각이 원망과 불평으로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본질적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일도, 광야를 지나는 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준비 하신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면 열매인 것입니다. 실패하는 세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신”입니다. 거기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어떤 문제를 만 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믿음으로 의지하 지 못했습니다. 믿고 맡기지 못하고, 기도하면서 응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나갑니다.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 갈 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요단을 특별한 방법으로 건너게 하십니다. 그것도 지팡이가 아니라, 언약궤에 의지해서 건너게 하십니다.


승리하는 세대의 문제의 핵심 처리법은 성결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 가지 중요 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성결입니다. 수 3: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5절,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결”에 해당하는 ‘코데쉬’가 ‘거룩, 성결’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거룩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구별”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구별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 에 구별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창조되어서 구별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드려져서 구별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존재해서 구별됩니다. 그래서 “거룩”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단을 건너려면, 그래서 승리하는 세대가 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이 되려면, 성결이 되려면, 나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결”이란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붙잡고 있으면, 성결이 되지 못합니다. 성결이 되지 못하면, 내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나를 오히려 집어 삼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살았는데, 하나님이 그 지팡이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무엇이 되었습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지팡이가, 사실은 나를 삼키려고 하는 뱀 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지 않은 것을 의지하면, 그것은 도리어 여러분의 인생을 삼키는 도구가 됩니다. 재물(지식, 배움)이 성결하게 되지 않으면, 여러분을 집어 삼키는 탐욕의 도구가 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던져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지팡이를 만지셔서 모세에게 다시 돌려줍니다. 그러니까 성결입니다.


승리하는 세대의 문제의 핵심 처리법은 언약궤입니다.

그 다음에 “언약궤”가 나옵니다. 이게 둘째 개념입니다. 거룩(성결)의 상태 에서 언약궤를 따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실 때는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에서는 언약궤를 사용하십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성결의 도구였지만,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의 의지와 업적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의지하면서, 모세의 땀과 업 적도 자연스럽게 지팡이에 담겨 지게 되었습니다. 그 지팡이를 들어서 홍해가 갈라지게 할 때는 괜찮았습니다.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할 때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의 의로움을 드러내던 지팡이가, 모세의 불의도 드러내는 교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다시 므리바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는데, 이때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는 반석에게 명령해서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지팡이로 반석을 때려 버립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반석을 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한때는 영광의 도구였는데, 그 영광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모세의 지팡이”는 인간의 율법적 한계를 드러낸 도구입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승리와 성공에 취해서, 자기 자신의 율법적인 의로움을 내세우고 자랑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나 타내고 자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교만이 자기를 넘어지게 합니다. 모세와 같은 인물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가로채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보여준 것이 모세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는 언약궤를 매게 하십니다.


승리하는 세대의 문제의 핵심 처리법은 싹난 지팡이입니다.

언약궤 안에 담겨 있는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십계명 돌판과 만나,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 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동시에 인간의 죄와 불의가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이 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처음 먹을 때는 좋았습니다. 하 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이 만나에 실증을 냅니다. “이 식물이 박하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서 불평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론에게 대제사장직을 부여하셨습니다. 언약대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론의 제사장직에 문제를 제기하고,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도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불가피하게 나타낸 징표가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이 언약궤 안에 담겨진 엄청난 은혜가 보이십니까?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가는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며, 인간의 죄와 허물입니다.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와 허물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증거품입니다. 이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의로움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인생이 끝나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나안 세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할 확실한 증거를 짊어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을 건너는 공로가 누구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공 로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절대 은혜”입니다. 아무런 공로없이 그냥 얻게 되는 값 없는 은혜가 됩니다. 이런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승리하는 세대의 문제의 핵심 처리법은 믿음의 요구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을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런 공로도 없는 나를 구원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와 동행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사명까지 맡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를 먼저 생각하고, 먼저 감사하고, 먼저 찬송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 보십시요. 그러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이미 내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다고 믿으면, 슬픈 일도 신비이고 기쁜 일도 신비입니다. 절망스런 일도 신비이고, 영광스런 일도 신비입니다. 좋은 일도 신비이고, 안 좋 은 일도 신비입니다. 은혜만 안다면 영원토록 “감사”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필립 멜랑히톤이 “그리스도인이란 은혜를 아는 자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셋째 개념이 “먼저 요단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홍해를 건널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고 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단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8절입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 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요구하신 것 입니까? 믿음입니다. 출애굽 세대에게는 아무런 믿음도 요구하지 않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요 단에서는 백성들의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라 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약속이지, 현실은 물이 흘러 넘치는 추수의 때입니다. 물이 범람하고 물살이 강한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현실을 먼저 바꿔 주신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약속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요구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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