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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10_세 번째 말씀,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 20:3-7)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세 번째 말씀이 7절에 기록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이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세레트 핫데바림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이름이 존재 자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란 단순하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다.


7절 말씀을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렇게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도 하지 못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1.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해야 한다.


“망령되게”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웨’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라솨웨’의 어근이 ‘샤웨’인데, 이 단어는 크게 세 가지로 의미를 나누어서 살펴볼 수가 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이며 중심적인 의미는 ‘공허, 허망함, 가치 없음’ 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에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세 번째 말씀은 “공허하고 허망한 일을 위해서, 가치가 없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 된다. 두 번째는 ‘샤웨’라는 단어가 ‘거짓과 속임수’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구를 속이거나 사기치기 위해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끝으로 ‘샤웨’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혹은 범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치거나 정죄하거나 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세 번째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는 명령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남용하거나 오용하거나 악용하거나 사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찬양, 감사 등에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사용해서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결론이 어떤 것이라고 했나? 잠 23:18절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늘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KJV 성경에서는 “장래”라는 단어를 “future”가 아닌 “end”로 번역했다. 여기서 말하는 장래는 단순한 미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래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다. 마침내 찾아오게 되는 그 날, 그 시간, 그 순간이다. 그 마지막 순간이 보장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우리는 “부르다”라는 단어에서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에서 “부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팃사’이다. 이 단어는 ‘들어 올리다, 맹세하다’라는 뜻의 단어인 ‘나사’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들어올린다, 이름을 높이 세운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려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세워드려야 한다.


그런데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면”,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높이 들어서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자기의 욕심을 들어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아를 들어 올려서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가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과 참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면, 내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인되시는 하나님, 주인되시는 예수님, 주인되시는 성령님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드러난다는 것은 주님과 온전하게 연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망령되게”에 해당하는 ‘라솨웨’는 “헛된 것을 위하여, 거짓을 위하여, 범죄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7절)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범죄이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붙어 있지 않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지 않고 떨어져 있으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허무와 죄악과 거짓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신앙에는 두 가지 신앙이 있다. 하나님이 하는 신앙이 있고, 내가 하는 신앙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하는 신앙은 하나님께 붙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신앙이다. 반면에 내가 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떨어져서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면 실패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기를 내어드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하신다.


3. 성도의 입술과 언어가 거룩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드러나는가? 우리의 혀와 입술을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입술과 혀를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 우리의 입술과 혀가 “망령된 것”으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 백성다운 언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 3:10절을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했다. 그 입에서 찬송의 열매를 심으면 찬송이 나오고 저주를 심으면 저주가 나온다는 뜻이다. 잠 18:6절 말씀에서는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니까 다툼을 일으키게 되고, 자기 말이 올무가 되어서 결국에는 화를 당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다 하는 걸 독설이라 하고 그런 사람을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독선적인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시나? 마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각 사람이 한 말에 대해서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말들이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4:25절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다.


부정적인 말들은 거의 모두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성도는 긍정적인 감정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즐거움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근심을 선택할 수도 있다. 기쁨을 선택할 수도 있고, 슬픔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항상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선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도는 긍정적인 영혼이 되어서 하나님 백성답게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을 야고보는 7가지로 이야기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성결한 말을 하라는 것은 깨끗한 말, 거룩한 말을 하라는 것이다. 욕이나 더러운 말을 쓰지 말라는 뜻이다. 화평의 말이란 싸움이나 다툼을 유발하지 않게 하는 말, 평화를 가져다 주는 말을 하라는 뜻이다. 관용의 말이란 용서하고 감싸주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관용의 말이란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면서 공감하면서 듣고 말하는 것이다. 양순의 말이란 온순한 말을 뜻한다. 거칠지 않은 말, 잔잔한 말이다. 긍휼의 말이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말을 쓰라는 것이다. 사람을 모욕하거나 업신여기는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 다음, 선한 열매가 가득한 말을 쓰라는 것은 악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선을 도모하고 이루려는 말을 쓰라는 뜻이다. 분열을 주장하고 갈라놓고 편을 만드는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끝으로, 편견과 거짓이 없는 말을 쓰라고 했다. 공정하고 진실된 말을 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 심는 말에 의해서, 죽음의 열매를 맺기도 하고 생명의 열매를 맺기도 한다. 잠 18: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맺으리라”고 했다. 진정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믿음의 말들이다. 왜 그런가? 믿음의 말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들에 반응하신다. 믿음의 말에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독한 질병을 고치기도 하신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란다. 믿음의 말은 긍정의 말이다. 나를 긍정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긍정하는 말이다. 상황이 어떨지라도 믿음의 말을 포기하지 않는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말에 반드시 행동을 개시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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