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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7_두 번째 말씀,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1(출 20:3-7)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어려운 관념이 아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확실한 정의이다. 신앙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면 간단하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지, 아니면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고 사는지를 보면 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인간은 철저히 자기중심, 자기 열심, 자기 노력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성령님에게 신앙 문제, 가정 문제, 직장이나 사업 문제를 맡겨 보시라. 여러분의 노력으로 해결 안 되던 문제들을 성령님께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런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해야 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하나님께서 우상을 금지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두 번째 말씀은, 간단히 말하면 우상숭배를 금지시키는 내용이다. 이 대목에서 핵심은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이다.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고대 사회에서는 모든 종교에 신의 형상이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데 있어서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4절)고 하셨다.


신을 예배하기 위해서 신상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나쁜 것일까?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첫 번째 말씀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면, 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그것만 보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도 더 열심히 신앙하기 위해서 여러 모양의 상징들을 만들지 않나? 특히 십자가 모양의 형상들을 많이 만들지 않나?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런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이 말씀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성도가 하나님을 보기 원하는데,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렇다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실 때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시지 않으셨다. 어떤 형상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형상으로 인간에게 계시하시거나 임재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셨다. 그러니까 “말씀”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2.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답이 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다가설 수 있을까? 그것도 역시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형상이나 우상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가지 않는다. 우상이나 표적을 보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신명기 4장을 보면, 이 부분이 더욱 확실해 진다. 신 4: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음성으로만 그들에게 들려지시고, 형상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신 4:36절을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하늘에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으로 교훈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들려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는 말씀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말씀이 소중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곧 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경으로 주신 66권의 성서에 대해서 관심하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도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정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정성껏 묵상하고, 배우고,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살다보면 삶에서 말씀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말씀을 체험하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하나님과 닮아가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으로 이정표를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주님과의 친밀감이 이루어지고, 주님과 닮아지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과 닮아진 인격이 되어서, 내 안에 내가 있는지 주님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온전한 연합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3.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성도에게는 말씀을 듣는 귀가 중요하고, 말씀을 듣는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놓쳤던 때가 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렘 6: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할례란 한 마디로, 죽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이 할례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귀가 죽어져야 하는데 살아서 교만하니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다.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성도란 어떻게 해야 하나? 말씀이 들려지도록 자기를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 듣는 귀가 되어야 하고, 듣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 참된 연합을 이루어 살게 되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읽게 했다. 그것이 느헤미야 8장의 기록이다. 에스라가 그들의 목전에서 율법책을 펼칠 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다.(느 8:5-6)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 주었는데,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에서 시작된다. 그들에게 부흥이 일어난 이유는 마음과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무슨 특별한 말씀이 있어서가 아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성경과 똑같다. 그냥 그것을 읽어주었을 뿐이다. 느 8:9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백성이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는 것이다. 말씀에 반응을 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하고 그 다음은 울어야 한다.


결혼생활이든지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반응을 잘해야 하지 않던가? 말씀도 마찬가지다. 반응을 잘하면 앞에서 말하는 사람도 더 잘 전하게 된다. 은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자꾸 반응하면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은혜의 상태가 되시기 바란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면서, 말씀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시는 믿음의 선진이 되시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최고 최상의 은혜와 선물을 말씀 안에서 체험하고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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