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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나 이름이 아니라, 열매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7:20-23)


말씀을 오해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고 했다. 마 7:14장에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했다. 일단 택함을 입은 자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따라오셔야 한다. 수가 적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마 7: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주여 주여”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여 주여”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왜 “주여 주여”하는가?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여 주여”라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천국 영생의 삶으로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이며,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여 주여”라고 하는 고백 말고도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했다. 여러분, 말씀을 통독하고, 묵상하고, 듣고,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말씀으로 여러분의 지성을 갈고 닦으려는 것이 목적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란다. 말씀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말씀의 목적이 순종에 있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말씀이다. 그런데 말씀의 목표가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있다. 듣고 아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죄송한 말씀이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믿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이도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순종이 나가지 않는 것이다. 신앙이 헷갈리는 때가 있고, 예배의 목적이나 신앙의 목적이 흔들릴 때가 있는 것이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 속에서 살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열매로 판단을 받는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시라. 22절을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우선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존 스토트가 표현한 대로, 그들은 “열렬하다.” 그들이 표현한 것이 “냉랭하거나 형식적인 ‘주님’이 아니라 열정적인 ‘주여 주여’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선지자 노릇을 했다. 예언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말씀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뜻이다. 따르는 무리가 없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나?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고, 설교하기도 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다.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23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유가 무엇인가?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한다는 것인가? 열매이다. 그것도 어떤 열매인가? ‘칼로스’이다. 아름다운 열매, 주인의 목적에 합당한 열매인지를 보고 판단받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예수님께 부정당한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나?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에게 열매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열매가 있다. 그런데 왜 책망을 받았겠나? 그들의 열매가 “아름다운 열매”가 아니라 “나쁜 열매”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낸 열매가 ‘포네로스’이다. 악한 열매들이다.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열매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아름다운 열매를 얻는다.

왜 그들이 “나쁜 열매”를 냈을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21절을 보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누구의 뜻대로 행했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내게 되었다는 말씀이겠나? 자기의 뜻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이 아니라, 자아가 지시하는 방향에 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에 생명을 걸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자기를 향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주인의 뜻을 향해야 한다. 이 말씀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건하고 정통적인 말에 감명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여전히 선한 순종의 행위로 진지함을 보일 것을 요구하신다.” 어떻게 순종의 행위로 진지함을 보여드릴 수 있나?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바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목적에 자기를 드릴 때 가능하다. 아름다운 열매란 하나님의 목적을 겨냥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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