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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고난 중에 더 강해지게 하신다.(출 1:8-14)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라.


출애굽기를 제대로 관통하려면, “경륜”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경륜”이란 말이 신약에 9번 정도 나옵니다.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미아’라고 하는데, ‘집 안’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규범, 관리’라는 뜻의 ‘노모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 즉 청지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오이코노미아’는 ‘집안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오이코스’는 단순하게 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의미하기도 하며, 더 크게는 “온 우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이코노미아, 즉 경륜”이라고 하면, ‘청지기가 집 안을 관리하듯이, 하나님이 온 우주를 관리하고 다스리시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기를 기준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족속을 하나님이 어떻게 관리하고 다스리시는가?’ 하는 것이 “경륜”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집을 관리하는 것과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관리하는 것은 규모부터가 다릅니다. 애곱으로 이주할 때 야곱의 가족이 70명이었는데,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족속은 200만이 넘습니다. 출 12:37절을 보면,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왕이 말하기를,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큰 집안을 어떻게 관리할 것입니까? 집을 관리하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는 지도자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 지도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자랐는데,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가 되어 40년을 외로움 속에서 연단받으며 지냅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시는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쓰십니까?

모세를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보면, “내려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졌던 자기의 신분도, 배움과 지식도, 말하는 능력도, 힘과 혈기도 다 내려놓게 하십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목자로 살게 하면서 다 내려놓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제가 무엇이기에 이스라엘에게 갑니까? 저는 입이 둔하여 말도 잘하지 못합니다”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교만이 빠진 상태입니다.


자기 힘으로 말고, 하나님의 힘으로 가라.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으로 깎여진 세월이 80년입니다. 완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데 걸린 시간이 80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길은 세상이 생각하는 방법과 다르게 갑니다. 내 힘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도란 자기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고, 영적인 삶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뭔가를 이룰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걸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가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일들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출 1장에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힘이 없고, 하나님은 힘없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앞서 출 1:6절과 7절에서, 요셉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번성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8절 이하에서도 그렇습니다. 애굽의 왕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힘으로 억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무거운 노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12절에 보니까,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라고 했습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출 1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애굽 왕이 이스라엘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서 명령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딸을 출산하면 살려두고, 아들이면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20절,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드디어 “은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주목해서 보십시요. 이렇게 번성하고 강해져도 이스라엘은 실제적인 힘이 없습니다. 애굽의 왕이 노역을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일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힘이 없는데, 하나님이 번성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강제적으로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조성해서, 그렇게 살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강해질수록 애굽의 왕이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힘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베이스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관리하게 하실 “청지기, 즉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난 체험을 끝까지 붙들고 가라.


이렇게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길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체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근원체험”이라고 합니다. “내가 있어서 체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체험이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여러가지 체험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이 바울된 것은 체험을 통해서 되었습니다. 사울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했기 때문에, 바울이 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멕섹 도상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체험 앞에서 꼬꾸라진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된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의 목자”였던 모세가 언제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 모세가 됩니까?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체험을 한 순간부터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 모세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존 웨슬리도 성공회 목사였지만, 전도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실패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더스게잇”에서 말씀과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세상을 흔드는 설교자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근원체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 한 사람의 존재와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험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자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때 이런 체험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계속 사울로 살 것이냐, 사울인 나를 죽일 것이냐”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만난 베드로는 “계속해서 회개없이 살 것이냐, 나를 죽이고 회개하고 주님을 따를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모세도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광야의 목자로 살 것이냐? 그 자아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목자로 살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에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근원체험은 “자기 죽어짐”의 결단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고난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8절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새 왕은 셈족 계열의 “힉소스 왕조”에 대항해서 일어났습니다. 반역을 하고, 나라를 뒤집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요셉의 후손에 대해서 호의적이던 왕조가 아닙니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강하게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번성할수록 고난은 더해집니다.


그런 고난의 여정들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근원체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삶과 죽음의 문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세워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더 강해지는 성도가 되라.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성도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장을 잘 묵상해 보십시요.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연약해지고 망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힘든 과정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고난 중에도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게 하면서,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여러분도 주님과 만난 “근원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인생이 뒤집어지는 체험,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체험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만난 체험, 삶과 죽음의 영역에서 주님을 만난 체험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그거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은 고난 중에 더 강해지게 하신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난이 여러분의 신앙과 인생을 더욱 강해지게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만남의 체험, 그 만남의 감격이 흔들리면, 이게 다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해, 여러분이 신앙하면서 처음 만남의 체험을 붙잡고 끝까지 가십시요. 처음 감격의 시간, 처음 눈물의 시간, 처음 회개의 시간. 그런 “처음”의 시간을 붙잡고, 끝까지 가십시요.

그러면 어떤 고난과 환난도 여러분을 무너지게 하지 못합니다. 흔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날마다 더욱 영적으로 강건해질 것입니다. 신앙의 반석이 더욱 든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붙는 생활의 은혜도 주님이 역사하셔서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삶, 그런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내는 복된 삶, 그런 삶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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