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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로는 변하지 않는다, 회심으로 변한다.(고전 15:50-58)

리얼리티인가, 액츄얼리티인가?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리얼리티”의 세계입니다. ‘노나카 이쿠지로’라는 교수가 [생각을 뛰게하라]는 책에서, “리얼리티”와 “액츄얼리티”를 비교했습니다. 둘다 ‘현실, 사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리얼리티”는 관찰을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대상화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리얼리티 예능”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온갖 활동들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관찰하듯이 봅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능에 나오는 사람은 대상이고, 나는 주체입니다. 나와 그들을 분리해서 “그냥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게 “리얼리티”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액츄얼리티”는 뭐냐? 한 마디로 “관계성을 통해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성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 현실이 “액츄얼리티”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능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리얼리티”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관계하면서 체험하는 것이라면 “액츄얼리티”입니다. 그러니까 “리얼리티”에는 관계성이 없고, “액츄얼리티”에는 관계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리얼리티입니까, 액츄얼리티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리얼리티도 액츄얼리티도 없이 삽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다 사실이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2: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을 헬라어로 ‘프시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이나 성령의 역사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구원과 멀어져서 지옥의 영벌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리얼리티에서 액츄얼리티로!


어떤 분들은 신앙을 “리얼리티”로 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와 어떤 관계성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진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구원의 사건”이 나의 추악한 범죄와 인간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것을 “리얼리티”로 보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깊은 관계성”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부활이 오늘의 나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의 나와 어떤 관계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내 인생과 어떤 관계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영적인 삶을 살아내지는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할 때, 헬라어로 ‘사르키노이스’라고 했습니다. 앞서 “육에 속한 자”라고 할 때는 ‘프시키코스’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할 때는 ‘사르키노이스‘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구원받은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기는 했지만, 자연적인 본성을 버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했다고 말합니다. 육신적인 본성, 자아의 욕망,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는 있지만, 주님의 뜻에 자기를 조정하고 순종하지는 못합니다.

신앙을 “리얼리티”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자주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때 잘못했는데, 그때 좀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그때 다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혈기를 참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 제목처럼 “후회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후회로 인생을 끝낸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 유다이지 않습니까?

후회는 자기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붙들고, 자기의 잘못을 붙들고, 자기의 실수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후회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목사님, 예전에 제가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때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서, 똑같은 혹은 비슷한 실수나 잘못을 저지릅니다. 왜 입니까? 후회만 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후회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것을 후회했습니다. 후회만 하다보니까 인생의 종말이 비참하게 끝납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회개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베드로도 주님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달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메타노이아’ 즉, 방향을 완전히 돌렸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붙들고 씨름하던 것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붙잡혀서 씨름하고, 주님의 뜻에 붙잡혀서 씨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고, 자기는 말씀에 따라서, 주님의 뜻에 따라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처럼, “후회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개로 변화됩니다.” 리얼리티의 신앙이 위험한 것은 후회만 하다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액츄얼리티”로 볼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의 나와 관계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 관계”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바울이 “신령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이스’인데, ‘영적인 사람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자기의 육신과 마음이 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요. 고전 15:50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성도가 쌔어 있어서, 혈과 육을 따르지 말고 성령에 이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1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그 날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52절과 53절을 보십시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지금 엄청난 말씀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썩어질 육신을 입고 사는데, 이게 썩지 않는 것으로 다시 입혀진다고 했습니다. 죽어질 육신을 입고 사는데, 죽지 않을 것으로 다시 입혀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게 패배합니다. 누구도 육신의 죽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죽지 않을 육체를 다시 입고 사망에게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최종적으로 고백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7-58) 바울은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두억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액츄얼리티로 받아들이는 사람, 즉 자기와의 관계성으로 끌어안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절이 여러분에게 정말 기쁨으로 다가온 것입니까? 정말로, 내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과 같은 감동과 기쁨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이 ‘리얼리티’로 받아들여지면 그게 안 됩니다. 리얼리티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액츄얼리티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액츄얼리티”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인정하는데,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고백이 없습니다. 주님만 홀로 매달려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주님과 함께 매달려 있는 십자가로 보여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에서 더 나가야 합니다. 나도 함께 죽고, 나도 함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공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나의 저주받은 인생, 나의 죄악된 자아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로로 내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새생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부활의 진짜 감격입니다. 거기로 가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 밑에 한가롭게 서서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십시요.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시 부활하십시요. 그래서 주님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명이 되고, 주님의 뜻이 여러분의 뜻이 되고, 주님의 길이 여러분의 길이 되게 하십시요. 거기에 진정한 부활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믿음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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