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마음이 행복의 진면목을 보게 하는 열쇠이다.(마 5:3-12)


로이드 존스는 “팔복에는 매우 뚜렷한 순서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팔복에서 본문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고 했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 맥아더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의 삶에 반드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만한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존 스토트도 똑같다. 그는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가난, 영적 파산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그런 사람들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고 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마 5:3)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가벼워져야 한다. 율법적인 자아가 깨지고 부서져야 행복의 진면목이 발견되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과 그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심령”이란 헬라어로 ‘프뉴마’이다. ‘프뉴마’는 ‘영’이란 뜻도 있고, ‘마음’이란 뜻도 있다. 마음과 영이 자기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으면, 말씀이 들어가서 싹을 내지 못한다. 마음이 여러 가지로 무겁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기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까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지면, 그것이 자리를 잡아서 싹을 내고 열매를 내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라고 표현할 때, 헬라어로 ‘프토코이스’를 사용했다. “가난”이란 뜻의 헬라어 ‘프토코스’에서 나온 말이다. 기억하시나? 헬라어로 “가난”이라고 하면, ‘페네스’라는 말과 ‘프토코스’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페네스’라고 하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없어서 불편을 느끼는 가난’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생명과는 직결되지 않지만, 없으면 불편한 것이 있다. 그런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가 ‘페네스‘이다. 그런데 ‘프토코스’라고 하면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없는 상태를 ‘프토코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란 완전히 파산한 상태이다. 어떤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덜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상태라는 뜻이다. 여러분에게 의지할만한 어떤 사람이 남아 있다든지, 의지할만한 어떤 물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기를 원하신다. 어느 날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이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노력이나 열심이나 소유를 가지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불의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는 우리의 무능을 고백하며, 우리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다. 내 자아가 죽고, 욕망과 자랑이 죽고, 노력과 의지가 죽는 것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

2. 가난한 마음이 어떤 믿음으로 나가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볼 때,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기를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고백한다.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구나. 내가 계획했던 일, 내가 믿어온 능력과 젊음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로구나!’ 이것을 깨닫고 주님만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다스리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그렇게 자기를 내어드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부자 관원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재물을 모았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의 현재를 성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생도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신뢰하는 것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기억하시는가? 부자 관원에 대한 이야기를 킹제임스 버전 성경으로 읽으면, 한글 성경에는 없는 말씀이 나온다고 했다.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의 원문을 ‘표준 원문’(Textus Receptus)라고 하는데, 거기에 막 10:24절에 생략된 표현이 나온다고 했다.

헬라어로 ‘투스 페포이도타스 에피 토이스 크레마신’인데, “Them that trust in riches”로 번역했다. 우리 말로는 ‘부를 신뢰하는 사람들, 재산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르게 표혀하면, 자기의 소유를 신뢰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막 10:26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왜 그렇게 놀랐나?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의지하는 존재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많든지 적든지, 그것을 의지한다. 자기의 소유를 의지하고,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고, 자기의 경험을 의지한다. 그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속으면서 산다. 그것이 자기를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할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기를 의지하는 것으로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행복의 진면목을 찾을 수도 없다. 성도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자기는 완전히 파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3.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복된 삶이다.

오늘 말씀에서 약속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천국”이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진 나라이다. 그러면 누가 이 나라를 볼 수 있을까? 믿음으로 보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보여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보여지지 않는다.

엘리사의 사환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안목이 없었다. 그러니까 도단성을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을 보면서 두려워했다. 반면에 엘리사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에워싼 대적들보다 훨씬 강력한 천군천사를 보았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안목이 열리니까 모든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려 주신다. 앞에서 부자 관원은 결국 이름이나오지 않는다. 그의 존재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존재를 바꾸신 사람들의 특징은 새로운 이름이나 별명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한 사람의 아버지’란 뜻이었는데, ‘열국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래는 ‘수태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는데,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몬은 ‘흔들리는 갈대’라는 뜻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울은 ‘큰 자’란 뜻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작은 자’란 뜻의 ‘바울’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삶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누가 그들의 존재를 바꾸고, 그들의 삶을 뒤집어 놓으셨는가? 그렇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신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을 완전히 역전시켜 주신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그 분의 은혜 안에 머물면 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자기를 내어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만유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만사를 책임지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