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이 은혜로 채워지기를 구하라(마 6:9-13)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기의 주장이 나가고, 자기의 의가 나갈 때가 종종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라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벌벌 떨어야 한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 이게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받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에 사로잡혀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 마 6:12절 말씀에 나오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구절을 통해서, 이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
1.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았지 알아야 한다.
엡 2:1절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헬라어 ‘하마르티아’인데,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니까 그것을 과녁으로 삼지 못한다. 그러니까 목표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화살을 날리고, 결국 과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보지 못하면 죄가 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선언하신 것이다. 아담이 그것을 볼 때마다 동산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고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셨다. 동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아담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터치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산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무를 볼 때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안에 있는 뜻을 보지 않으니까 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엡 2:1절에서 언급한 ‘허물’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도 하다. 허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파랍토마’인데, 이는 ‘법을 위반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 곁에, 옆으로’라는 뜻의 단어 ‘파라’와 ‘넘어지다, 떨어지다’라는 뜻의 단어 ‘핍토’가 합쳐진 말이다. 실수나 고의로 탈선한 것인데, 본질적인 관계로부터 떨어지게 된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청지기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아담은 에덴을 다스리고 경작하는 청지기였다. 그런데 아담이 탈선하게 된다. 그것이 아담의 허물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허물과 죄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 심판과 저주로 떨어져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다.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는 상업적인 용어인데, ‘빚을 다 갚았다. 완불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의 값을 다 갚아 주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은혜를 알고 나면 은혜에 붙잡혀야 한다.
예수님은 마 6:12절에서 죄의 용서와 관련한 말씀을 주셨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로 사용된 단어는 헬라어 ‘오페일레마’인데, ‘누군가에게 빌려서 가지게 된 빚’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빚진 것이 무엇이겠나? 인간은 하나님에게 죄의 빚을 지고 있다. 이 빚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해소될 수 있는 빚이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마 18장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종은 일만 달란트를 갚을 능력이 없다. 마 18:6절을 보면,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이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왜 그랬나? 종은 주인에게 빚을 다 갚겠다고 했지만, 주인은 그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의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은 죄의 빚은 스스로 갚을 수가 없다. 성경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예수님께서 갚아주셨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죄를 용납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신 은혜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삶이 진짜 은혜로 채워져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존경받는 성도가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진짜 영향력있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3. 은혜가 흘러가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마 6:12절 말씀을 다시 보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에게 빚진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없애 주었다는 말씀이 앞에 있다. 이 말씀은 기도를 하기 전에 이웃과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는 맥락의 말씀이다. 나에게 빚진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채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빚을 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형제나 자매 중에서 내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을 해결하고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목을 이룬 상태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왜 그런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4-25)고 했다. 교회가 서로 돌보고 하나가 될 때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행 2장에 소개되어 있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을 여러 번 다루었다. 행 2:1절에서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다같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하판테스 호모투마돈’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호모투마돈’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냥 단순하게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여”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KJV 성경은 ‘호모투마돈’ 이라는 헬라어를 확실하게 표현했다. “they were all with one accord in one place.” 그들이 모두 마음을 합하여 한 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나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에 언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했나? 교회에 언제 부흥이 임하고, 언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세워지게 된다고 했나? 교회가 하나가 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흘러가야 한다.
여러분, 은혜가 흘러가게 하시는 믿음이 되시기 바란다. 교회가 좋은 곳, 좋아할 만한 곳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힘쓰시 바란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드러내고, 은혜를 보여주고, 은혜를 흘러가게 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 교회가, 또 여러분이 그런 삶으로 나가게 되시기를 정말 소원한다. 갈등에 사로잡히지 말고, 은혜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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