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축복(창 24:50-60)
창 24장을 전체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종이 말을 할 때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들은 대로 잘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다. 자신이 들은 대로, 그리고 자신이 행동한 대로,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나? 전달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기대했던 대로 응답이 온다. 가족들이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 삼는 일에 동의한 것이다.
리브가의 경우에는 가족들보다 더 깊은 신뢰를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종이 아침에 바로 떠나겠다고 하는데, 리브가는 바로 따라 가겠다고 대답한다. 머뭇거림이 없이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뜻이다. 리브가가 이렇게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천만인의 어머니, 생명의 씨앗”으로 축복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리브가가 늙은 종의 이야기를 잘 들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노종도 말씀을 잘 들었고, 리브가도 그가 전해준 말씀을 잘 들었다. 있는 그대로 말씀을 잘 들으니까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된다. 그러니까 성도란, 잘 듣는 마음을 잘 가져야 한다.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은혜 가운데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
1. 첫째로,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지혜가 생긴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무엇일까?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 왕상 3장에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솔모몬의 이야기가 나온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는 것이다. 이 때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나?
솔로몬은 지혜를 얻었지만, 그가 실제로 하나님께 구할 때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솔로몬은 왕상 3:9절에 보면,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라고 했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다. 지혜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한 솔로몬의 기도에 마음이 흡족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놀라운 말씀이다. 왕상 3:11절,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혜”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지혜가 무엇이라는 뜻인가? “듣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것,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것, 이것이 지혜이다. 자기 말을 하고, 자기 지식을 앞세우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혜란 잘 듣는 것이다. 잘 들으면 어떻게 되나? 잘 들으면 분별력이 따라온다. 잘 들으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있는 분별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2. 둘째로,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정체성이 분명해 진다.
사람은 자기의 무대가 어디인지, 자기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Self-Identity에서 Dignity가 나오게 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거기에서 그에 맞는 품위와 인격이 나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54절을 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는 브옐세바에서 리브가가 사는 곳까지 무려 800km나 되는 먼 길을 여행한 사람이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을 어느 정도 완수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며칠을 푹 쉬면서 휴식을 취할 법도 했다. 그런데 노종은 신속하게 주인에게로 돌아가도록 놓아 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자기에게 무엇이 맡겨져 있는지를 잘 알고 산다. 이것이 진짜 복된 마음인 것이다.
성도란 자기가 어디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이 세상을 무대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성공의 무대, 행복의 무대, 부귀영화를 위한 무대일까? 성공의 무대라면 성공을 추구해야 정답이다. 행복의 무대라면 행복을 추구해야 마땅한 것이고, 부귀영화의 무대라면 마땅히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이란 진정으로 어떤 무대일까? 그것을 요 16장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요 16:11절을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심판을 받았다”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형이 ‘크리노’ 인데, ‘정죄하다, 판결하다, 재판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은 상태, 정죄를 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다.
세상이 심판을 받은 상태라는 말씀은, 이 세상이 바로 심판의 무대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심판의 무대 위에 올라 선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겠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의 끝에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자기를 주인으로 삼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내가 하나님이고 내가 왕인 부분들이 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 내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나’라고 하는 자아를 더욱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다. 그 임금을 세상이라는 심판의 무대 위에 올려놓고, 심판받아 죽어지게 해야 구원으로 가는 은혜의 통로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3. 끝으로,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위로자가 된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머니 사라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 사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 때 이삭의 나이가 37세였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것이 63절에 짧게 나타난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이삭이 들에 나가서 “묵상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묵상하다”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슈아’이다. 이 단어는 ‘기도하다, 묵상하다’는 뜻도 있지만 ‘애곡하다’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 묵상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는 어머니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실제로 67절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리브가를 아내로 맞을 때, 이삭의 나이가 40세였다. 3년 동안 이삭이 어떻게 살았나? “저물 때에 들에 나가 기도했다. 묵상했다. 애곡했다.” 그는 날마다 들에 나가서 하나님을 묵상했다. 그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으로 들에 나갔다. 그리고 말씀과 언약을 묵상했다. 동시에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애곡했다. 그러다가 리브가를 맞이한 후에 그는 리브가를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언제나 우리 곁에 누군가를 보내 주신다. 나오미와 룻에게는 보아스를 준비해 놓으셨듯이, 우리에게도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보내주신다. 이삭에게는 리브가와 같이 사랑할 대상, 위로받을 격려자를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을 믿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돕는 손길들을 많이 준비해 놓으신다.
그런데 누가 그런 위로자가 되는지 아시나?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위대한 위로자로 쓰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을 가진 자,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서 듣는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듣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이렇게 복된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 해 동안 듣는 마음을 키우시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복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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