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붙잡고 가야 흔들리지 않는다.(마 11:2-9)


본질을 붙잡고 가야 한다.


본질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본질을 붙잡고 가야 올바른 목적이 보이고, 올바른 목적에 따라가야 올바른 신앙과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의 본질을 붙잡고 가니까 약속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언약의 본질을 붙잡고 가니까 약속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언약(말씀)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패배합니다. 반면에 “언약”을 붙잡고 믿음으로 순종하면 승리했습니다. 사울이 언약의 본질을 놓치니까 두려움과 번민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이 언약의 본질을 붙잡고 가니까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삼하 8:14)가 되었습니다.

마 11장이 주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질을 붙잡고 가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지금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헤롯은 ‘헤롯 대왕’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헤롯 대왕’의 아들이 ‘헤롯 안비바’인데,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헤롯 안디바가 이복 동생이었던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면서 본처와 이혼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는지 물었습니다.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물었을까요? 요 1장을 보면,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 1:29절에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튿날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이 계속해서 메시야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요 1:34절에서는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도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해방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 세상 나라를 심판하고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질문은 예수님을 의심한 질문이 아닙니다. 메시야로서 빨리 역할을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으십니까? 그러면 빨리 메시야의 일을 하십시요. 왜 아직도 메시야의 권능을 발휘해서 헤롯을 심판하지 않습니까? 속히 구원의 일을 행하십시오. 나를 감옥에서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에서 구원해 주십시요.”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이렇게 내가 기대하던 것과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응답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본질을 놓치면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신앙, 여러분의 가정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왔습니까? 젊은 시절에 꿈꾸던 것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루어졌습니까? 기대했던 꿈과 행복을 이루셨습니까? 그런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까? 혹시 기대와 많이 어긋난 부분도 있습니까?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을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게 좋은 일이면 감사한데, 좋지 않은 일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때 본질을 놓치면 흔들리게 됩니다.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메시야의 본질에 대한 메시지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요. 4절에서,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5절입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 35:5절 이하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사 61장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신 것입니까?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이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성취하면서, 메시야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본질을 알려 주시려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나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유로 하신 말씀이지만, 제자들은 바로 알아들었습니다.

당시에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던 지역이 갈릴리입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사용하던 동전에는 ‘갈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갈대”라는 말에서 ‘헤롯 안디바’를 금방 떠올릴 수 있습니다. 광야에 나간 것이 권세자를 보러 간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광야에 나가서 권세자를 만나 출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권세자를 만나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광야에 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에서는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눅 7:25에서는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라고 했습니다. 화려하게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사람과 만나서 무엇을 합니까? 화려함과 사치에 물듭니다. 쾌락과 교제하고, 권력과 출세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 나간 이유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광야에 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서 그 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나갔던 것은 요한을 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요한이 “회개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가 무엇입니까?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히브리어 ‘미드바르’가 ‘광야’라는 뜻인데, ‘다바르’와 ‘맴’의 합성어입니다.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이고, ‘맴’은 ‘나라’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미드바르’는 ‘말씀의 나라, 말씀이 있는 곳,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광야, 즉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세상의 왕을 만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는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광야로 가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사람과 만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쾌락과 출세와 자기 만족을 구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는 말씀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갔으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망각하면 마음이 어긋나고, 삶이 어긋나고, 신앙이 어긋나게 됩니다. 18-19절을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먹지 않을 때는 먹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먹고 마실 때는 먹고 마신다고 비난합니다. 이래도 흔들리고, 저래도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으면, 말씀에 붙잡히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과 만나고, 은혜에 붙잡히라.


교회에 와서 말씀의 은혜에 사로잡히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흔들리는 갈대를 찾고, 화려한 삶을 찾습니다. 권력을 찾고, 세속적인 이익을 찾고, 자기 만족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험담하는 종교인, 외식하는 종교인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본질을 놓치니까 그렇데 되었습니다.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그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전으로 왔으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왔으면 예배드리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전에 왔으면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야 합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 구원받은 생명이면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생명, 여러분이 받은 재물과 건강, 여러분이 받은 지위와 신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본질을 붙잡아야 올바른 목적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성의 본질을 잃은 관계성에서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사랑의 본질이 없는 만남이나 연애에서 열매가 있겠습니까? 본질이 빠진 신앙생활에서 열매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본질이 없는 사람은 친구를 사귀어도 우정의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을 가져도 영혼의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