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잘 설명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죄 아래에 있든지 은혜 아래에 있든지, 두 입장 중 하나에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아 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 아래”에 속해 있고, 어떤 사람은 “은혜” 아래에 속해 있습니다. 성경은 소속에 관해서 말합니다. 어디에 속한 사람 인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 속보다 사람의 성향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하기 전 에, 그 사람의 소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람이 어떤 성향인지, 어떤 성품 인지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소속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 아래”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아래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롬 3:18절에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에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을 삽니다. 반면에 범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앞에 계시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이 범죄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범죄하는 순간에 그의 마음과 생각 에서 하나님이 사라졌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에 대해서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역대하 12장을 보면,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 왕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대하 12:14절을 보면,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 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르호보암은 아합이나 므낫세 같이 대놓고 죄를 범하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행한 악이 무엇이 라고 했습니까?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굳게 하 다”로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 ‘헤킨’인데, ‘똑바로 서다, 정직하다’란 뜻입니다. 시편 78:8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때 “정직하다”로 번역된 말이 ‘헤킨’입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이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다, 똑바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악이었다고 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구하지 않는 것을 악”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르호보암”이란 인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은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도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자기를 구하면 서 살았습니다. 엡 2:3절에서, 바울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 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 고 영접하기 전에는 우리가 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엡 2:5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죽은 자”로 있었습니 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죄 아래에 속한 자”였는데, 지금은 “은혜 아래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과거의 상태, 죄의 상태”인 자기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집이나 차를 자기와 동일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상태”(Nothing)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교양있는 말을 하고, 예의를 지키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소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광야로 들어가서 알게 된 것입니다. 광야로 들어가서, “세상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의지할만한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일 것입니다. 거기서 오직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광야로 들 어가야 합니다. 광야로 들어가서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직면해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믿게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 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요. 19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 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모든 입을 막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들을수록 모든 입이 닫혀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들을수록 죄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 게 된다는 것입니까? 20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겠습니까?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라는 것을 본 사람(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나는 “Nothing”(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예수님 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Something”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부터 신앙이 긍정이고 적극이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또 은혜를 아는 사람 은 “웬만한 일”에 상처를 쉽게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고통과 환난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은혜를 알면,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버리고 무릎 꿇을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알면,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하셨습니다. 눅 18:9절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이 성전 앞으로 가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고,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감사해 합니다. 자기가 행한 일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바리새인은 은혜를 말하지 않고, 율법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셰례를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데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부인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 니까? “우리는 올바른 사람들이다. 거의 모든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의로움”에 대한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의로움”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열심으로, 자기 수행으로, 얼마든지 “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열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을 받아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확신과, 자기 사 랑이 모두 “자기 숭배”입니다. 바리새인이 가졌던 율법적 사고인 것입니다. 이게 깨져야 합니다. 자기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 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로서는 안 됩니다. 자기로서는 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이룰 수 있습니까? 무엇을 가져도, 어떤 것을 이루 어도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죄가 넘어가지 않은 상태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가졌다고 행복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행복하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음이 어둠입니다. 그래서 이게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로서는 도무지 죄 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가는 바른 방법이 “세리의 방법”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눅 18:13절을 기억해 보십시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했습니다. 자 기의 죄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께 올바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유산을 먼저 달라고 했 습니다. 아버지가 죽어야 받는 것이 유산입니다. 그런데, 미리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큰 불효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 났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기만 하면 자기의 꿈대로 화려하고 성공적인 인생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물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를 치는 종이 되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탕자는 문제의 원인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내가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될 텐데”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아 주었습니다. 목욕을 시키고 반지를 다시 끼워주었다. 반지는 신분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돌아온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서, 유산을 상속 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으로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세상에서 성공할 것 같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단절되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 습니다. 오히려 망해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 니다. 반면에, 탕자를 끌어안은 아버지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생명과 축복의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지난 삶을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죄와 허물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반대로, 죄송하지만 여러분이 세상 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느냐만 묻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한계가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아픔과 슬픔이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지가 중요합니 다. 구주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 3:16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가 멸망 당하지 않고 도리어 영생을 얻게 된 것이 반전입니다. 바울은 롬 8장에서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을 말합니다. 그런 일들이 인생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8: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는 성도, 이 은혜를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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