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포기하는 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겠나?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시나? 자기의 지식과 소유와 능력의 한계를 깨달아야 하나님을 온전하게 붙잡고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붙잡고, 그것을 의지하면서 산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잠 16:18절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성도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도록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겸손이 무엇이겠나? 하나님보다 내가 낮아지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 분의 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그런 겸손의 삶이 되도록 연단하신다. 그리고 요셉의 에피소드를 읽어가다 보면, 요셉의 마음이 그런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며 따라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시간,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바꾸시는 역사를 보게 된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더 세밀하게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 계획을 깨달아서, 더욱 겸손하게 신앙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1.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이 신앙의 생명이다.
요셉은 이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그의 신분은 노예였고, 그의 처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지만 요셉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결과였다. 그러니까 요셉은 감옥에 갇혀서도 신실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4절에 보면,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고 했다. 이것은 요셉이 얼마나 신실하게 감옥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증거하는 대목이다.
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을 오해해서 감옥에 가두었지만, 감옥에 있는 요셉을 신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요셉을 감옥에 가둔 친위대장이 당시에 중요한 인물이었던 두 사람을 섬기라고 했던 것이다. 요셉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처럼 요셉은 어디에 있든지, 자기의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실함을 유지했다.
지금 “신실하다”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신앙생활하면서,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실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신실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엡 1:1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신실한 자들”이란 말이 헬라어로 ‘피스토이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믿음을 가진 자, 진리의 말씀을 간직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믿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오’는 그 어근이 ‘설득당하다’라는 뜻의 단어 ‘페이도’이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설득을 당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이 있다. 약속의 말씀이 있다. 구원의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의 의미를 간직한 사람들, 그 의미를 알아듣고 설득당한 사람들이 “신실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간직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당하지 않으면, 말씀에 순종할 수없다. 언약과 말씀 안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성도들은 말씀에 설득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도들은 “신실한 자들”, 즉 말씀을 자기 안에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요셉의 모습을 기억해 보라.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꾼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큰 비전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언약에 설득당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에 자기의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나?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그를 형통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 길에 고난도 따르고, 그 길에 오해와 억울한 일도 따른다. 그 길에 외로움과 고독감이 따라오고, 그 길에 사망과 두려움도 따라온다.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을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신실한 자들이 누리는 “형통, 찰라흐”란 바로 그런 것이다. 계속해서 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계속해서 목적지로 나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 40:29절 말씀처럼,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면서”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시다는 말씀이다.
2. 순종에 따라오는 고난은 기쁨으로 바뀐다.
감옥에 들어오게 된 두 사람의 관원과 요셉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두 사람은 불순종으로 인해서 감옥에 들어왔고, 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왔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고난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고난은 반드시 기쁨의 면류관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구원하시려는 계획과 섭리를 반드시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후 7: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룬다”고 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근심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도의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되겠나?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그 마음과 영혼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순종할 때 따라오는 고난이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순간을 인내하고 이겨내면 반드시 기쁨의 면류관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요셉은 비전에 따라서 살려고, 매순간을 신실함과 순종으로 살아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고난과 시련이 끊어지지 않는다. 미움과 시기가 커져서, 사망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겨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타국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래도 주인에게 인정받아서 살만하다고 생각될 때, 주인집 여자에 의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만다. 감옥게 갇혀서 죄수로 살아야 했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인생의 고난과 시련이 ‘구원의 열매,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약 1:12절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시련을 견디어 냈다”는 말이 헬라어로는 ‘도키모스 게노메노스’이다. ‘불같은 연단을 견뎌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용광로에다가 금이나 은을 넣어서 불순불을 제거해 낸다. 그처럼 불같은 연단을 통해서, 성도에게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겠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까 성도란 고난의 현장에서도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을 꺾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고난이 반드시 기쁨의 면류관으로 바뀌게 된다.
3. 맡기면 해결된다. 그러니까 믿고 맡기라.
농부가 좋은 열매를 추수하려면, 손에 굳은살이 붙어야 한다. 돌을 걷어내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가꾸면서 굳은살이 붙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굳은살이 붙은 만큼 좋은 열매가 추수되는 것이다.
나도 기타를 친다. 여러분도 악기를 다루실 것이다. 처음에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줄을 잡는 손가락 끝이 아프다. 기타 치는 재미에 빠져서, 오래 칠수록 줄을 잡은 손이 더 아프다. 그때, 먼저 기타를 치기 시작한 선배들이 이야기해 준다.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몇번 붙었다 떨어졌다 해야 기타를 잘 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한참 기타를 칠 때는 굳은살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다시 붙었다가 떨어지면서 손끝이 맨들맨들해진다. 그리고 나서 현에 최적화된 굳은살이 붙게 된다. 그렇게 굳은살이 붙어야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굳은살이 붙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성도란 고난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마음과 영혼이 단련되어서, 더 성숙한 신자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삶의 환경이든지, 성도는 인생 자체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맡기면 해결된다. 풀리지 않던 문제들도 풀리기 시작하고, 답답했던 마음들도 시원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맡기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두 사람이 꿈을 꾸었을 때 근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은 자기의 꿈이 해석되지 않아서 근심한다. 자기들이 꿈을 해석해 보려고 하는데 해석이 안 된다. 자기의 생각, 경험, 이성,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염려가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반면에 요셉은 그런 두 사람을 위로하고 있다. 그도 똑같이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다. 왜냐하면 요셉은 하나님에게 자기의 인생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이 두 사람에게 말하면서 인생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해석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인생이 자기 생각대로 해석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기고 보면 해석이 된다. 요셉은 고난 중에 있지만, 믿음 안에서 자기 인생을 해석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문제가 믿음 안에서 해석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자, 이제 그의 인생이 어떻게 풀리는지 보시라. 정말로 중요한 말씀이 23절에 나온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그는 요셉이 꿈을 해석해 주었던 대로 구원받았지만,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다. 이처럼 사람의 기대는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가장 합당한 응답의 열매가 찾아온다.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요셉을 기억했다면, 요셉은 그저 감옥에서 구원함을 받았을 따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해 보라. 가장 잘 풀리는 길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요셉을 잊어버렸다.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놀라운 것이다. 그가 요셉을 잊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만 2년을 더 지낸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어디로 가지도 못하도록 감옥에 꽉 붙잡아 두신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그를 찾았을 때, 당장에 그를 소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나서야 요셉을 기억하게 된다. 그의 늦은 기억이 요셉에게 해가 되었나? 아니다. 오히려 그를 애굽의 총리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은 때때로, 더 깊고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는 계획 속에 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포함되어 있다. 삶은 때로는 행복으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방향으로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성도는 이 진리를 믿어야 한다. 믿고, 맡기고,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다려보라. 성경에 있는 말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 말씀대로 끝까지 밑고 맡기고 구해 보시라.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약속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가? 빌 4: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런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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