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에 삶으로 응답하라(마 5:3-12)


은혜라는 말이 헬라어로 ‘카리스’인데, 이것은 받기에는 완전히 부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 로이드 존스나 리차드 렌스키, 존 스토트와 같은 분들은 “은혜”가 죄를 지은 사람과 관계한다고 했다. 범죄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데 은혜는 그것을 넘어가게 한다. 죄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고,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A.W. 토저는 “은혜는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자신이 엄청난 은혜로 인해서 구원받았음을 알게 된 사람은 은혜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혜받은 사람의 삶에는 당연하게 따라오는 열매가 있다. 그것이 “긍휼이고, 마음의 청결이고, 화평하게 하는 것이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은 팔복에서 5번째 주제를 나누려고 한다. 그것은 “긍휼”이다.

1. 긍휼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긍휼”은 은혜와는 다르다. 이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을 이야기할 때, 은혜와 분리할 수가 없다.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은혜 이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긍휼이다.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엘레오스’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함’에 해당하기도 하고, ‘헤세드’에 해당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라함’은 단순하게 보면 ‘사랑’이란 뜻이고, ‘헤세드’는 ‘자비, 사랑, 인자’란 뜻이다. 그러니까 “긍휼”이란 큰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시 18:1절에서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사랑하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의 원형이 ‘라함’인데, 그냥 사랑이라기보다 모성애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라함’의 명사형이 ‘레헴’인데, 본래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있는 ‘태, 자궁’이란 뜻이다. 그래서 ‘라함’이 모성애적인 사랑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모성애적인 사랑이란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있는 그런 사랑이다. 생명을 품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이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그런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긍휼”에 해당하는 ‘엘레오스’는 히브리어 ‘헤세드’에도 해당한다고 했다. ‘헤세드’는 여러분에게 익숙한 단어이다. ‘자비, 사랑, 인자’와 같은 뜻인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란 ‘언약’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를 향한다고 했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끝없이 나가는 용서와 사랑이다. 반대로 언약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헤세드’라고 했다.

앞서 이야기한 “긍휼”의 의미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 보자.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성을 놓치면 안 된다.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성에서 가지는 사랑이다. 그들은 생명의 탯줄로 연결된 관계성이다. 이 관계성에서 깊은 사랑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다른 사람의 자식을 사랑할 수가 없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언약”의 관계성에 기초한다. ‘헤세드’의 기초는 ‘언약’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긍휼”의 기초도 언약이다. 약속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과 목적 안에 머무는 사람을 향해서 나가는 사랑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긍휼”이다. 이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여러분, 교회가 언약의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약속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된 공동체이다. 이 안에 “긍휼”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교회 안에서 “긍휼”, 서로에 대한 모성애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반면에 이것이 있으면, 긍휼에 긍휼이 더해진다.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지는 것처럼, 긍휼 위에 긍휼이 더해진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

2.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긍휼의 길을 가게 된다.

본래 인간은 죄로 인해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었다. 죄로 인해서 죽었던 영혼을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보셨다. 마 9: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마음을 뜻한다. 죄로 인해서 죽었던 영혼에 대해,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이 가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히 12: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러분은 십자가의 고통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오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영화를 통해서, 그 고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고통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고통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하지 않고, 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을까? 사람이 너무 창피하면 아픈 것도 잊어버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형벌을 받으셨다는 일, 죄가 없으신 분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다는 일.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 채찍의 아픔까지도 잊게 할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그런 수치를 당해야 하셨나? “사랑” 밖에는 답이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러분에게 들어간 긍휼의 은혜는 엄청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는데 하나님으로서 절대자로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져야하는 죄의 아픔을 모두 짊어지셨다.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그 모습이 무엇인가? 약하고 추하고 가치도 없는 것들을 그저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셨다. 그 마음으로 긍휼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 은혜를 깨달은 자들이 긍휼의 길을 간다. 엄청난 은혜 앞에서 엎드려본 사람이 은혜를 흘러가게 한다. 용서의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용서의 삶을 산다. 그러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은혜” 안에서 산다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3. 갈등에 붙잡히지 말고 은혜에 붙잡혀서 살라.

오늘 말씀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 “깊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결국 용서와 나눔으로 삶이 흘러가게 되어 있다. 용서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몇 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물었다. 여기에서 전제는 “형제”이다.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우선적으로 “용서와 사랑”이 흐르게 해야 한다. 안에서 “용서와 사랑”이 없는데, 밖으로 흘러갈 수 없다. 그것은 위선이라고 했다.

은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교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하게 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고 있다. 비난하지 않고 사랑하려고 한다.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한다. 성도란 갈등에 사로잡히지 말고 은혜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인생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내’가 없다. 자기의 자아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족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만족하고 기뻐하실 일을 따라간다. 결국 누가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인가? 주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이다. 결국,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란 ‘주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주인되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구도 여기에 예외일 수가 없다.

여러분, 주님이 주인되시게 하는 사람에게 “긍휼”의 은혜가 따라간다. 또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긍휼이 더해진다. 나는 여러분에게 “긍휼”의 마음이 가득해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할 때 이루어지는 마음인 것을 깨닫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늘, 더욱 여러분이 주님의 주인되심을 사모하고, 기대하고, 구하고, 찾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