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두려워 말라, 주님이 일하려는 것이다. (요 9:1-11)
- 신애교회
- 2일 전
- 4분 분량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끊임없는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교훈 삼아서 보면 현실의 문제가 아무리
강하고 크고 힘들다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이 만져주시기를 구하며 어떤 문제라도 넘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초로 만난 문제는 홍해였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어서 어디로도 갈 수 없을 때, 하나님은 홍해를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데 하나님은 먼저 이 땅에 들어가서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싸워서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중부 지역인 여리고성부터 시작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여리고가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수 6:1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이곳이 빈틈없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가데스 바네아 광야에서 정탐했던 사람들의 보고에 따르면 이
성읍은 크고 무척이나 강하고 견고한 성읍이며 그 곳 사람들이 기골이 장대하고 용사였다고 보고합니다. 철옹성과 같이 강한 여리고성도 하나님께서는 무너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마른 땅 되게 하시고,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이 끌어안고 씨름하는 문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넘어가게 하시고 이기게 하실 줄을 꼭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가 한 맹인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입니다. 직업이 없고 사람들에게 동냥하는 거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 9:1절)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이 일을 은혜의 관점으로 봐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찾아 가셔서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여섯 번째 일어난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7가지 기적 중에서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을 아시고 그 사람에게 가십니다.
(요 9: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그 당시를 살았던 유대인들이 가졌던 관점, 즉 인과 응보로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질병을 당하면 그게 그 사람의 잘못이든지 그 부모의 잘못이든지 아니면 그 조상의 잘못이든지 셋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출 20:5절)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민 14:18절)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을 조상의 죄가 자손에게 상속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은 죄가 상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부모나 조상이 아주 치명적이고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그 죄의 악한 영향력이 자손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마음, 그 죄의 본성에 대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겔 18:20)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죄인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서 심판받는 것이고, 의인은 자기의 공의로 인하여서 하나님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맹인 된 것이 누구의 죄인지 물은 것은 유대인들의 고정관념과 전통적 사고에서부터 나온 질문이라기 보다는 인과응보, 즉 신명기적인 사고의 패턴이며 율법주의적인 사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을 증거하고 율법에 따라서 사람들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정죄받은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된 인생을 살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목적성에 가치를 더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생각, 이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도록 도전하십니다.
(요 9:3절)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은 이유와 원인을 생각하고, 예수님은 목적을 생각합니다. 질병에 걸린 이유보다 질병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를 따지는 사람은 과거 지향적으로 살게 됩니다. 원인은 과거를 보게 합니다. 과거에 붙잡히면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거에 붙잡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은 회개로부터 시작되니 그 과거를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를 생각하며 원망하는 것을 도전해서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원인은 생각하지 말고 목적 지향적인 삶, 즉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미래 지향적으로 오늘 하나님과 내가 만나서 하나님이 내게 이루실 일이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 하나가 있다면 관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까지 충성스럽게 일을 진행하며 염려와 걱정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10명의 정탐군들이 현실적으로 싸워서 이기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으시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똑같은 현실을 바라보지만 한쪽은 믿음이 없고, 한쪽은 믿음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게 관점의 차이입니다. 믿음에 따라서 내가 세우는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점이 달라지면 언어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집니다. 믿음에 따라서 자신이 세우는 관점이 달라지는데, 이 관점에 따라서 언어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딤전 4:4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어떤 일이 들어왔을 때에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는 시련과 환란이 어떤 의미이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 23: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4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욥은 지독한 시련과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욥 1:21절)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지독한 시련을 통과했는데 욥이 욥이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관점 하나를 잘 세우니 흔들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욥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돌변합니다. 친구들이 욥을 정죄합니다. 욥에게 무슨 죄가 있다면서 죄를 고백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친구들이 자아에 상처를 주니 하나님께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자꾸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을 따집니다. 욥은 몸에 치명적인 질병이 들어왔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니 바로 흔들립니다. 욥의 진짜 문제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결국은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 마음을 잘 지켜야 관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현상에 붙잡히지 말고 고난을 주신 목적을 붙잡아야 합니다. 현상에 붙잡히지 말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시려고 하는 목적에 의미를 두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현실적으로’ 라는 관점이 아니라 ‘믿음으로’ 라는 관점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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